[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25>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2일 03시 0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다음날 패왕 항우는 날이 밝기 바쁘게 성고성 문루(門樓) 앞으로 말을 몰아가 소리 높이 한왕 유방을 찾았다.

“한왕은 어디 있는가? 어서 나와 과인의 말을 들으라!”

패왕이 그렇게 거듭 외치자 장수 하나가 문루를 지키는 사졸들을 헤치고 얼굴을 내밀며 이죽거리듯 패왕의 말을 받았다.

“우리 대왕께서는 벌써 어젯밤 초저녁에 이 성을 버리셨소. 옥문(玉門)으로 나가셨으나 등공(謄公) 하후영이 모는 수레를 타고 계시니, 지금쯤은 평음(平陰)을 돌아 관중(關中)으로 내달리고 계실게요.”

팽성 싸움 뒤로 하후영이 수레 모는 솜씨는 패왕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하후영이 빠른 수레에 한왕만을 태우고 밤을 틈타 잘 닦인 관도로 달아났다면 여느 말로는 뒤따라 잡기 어렵다. 간밤 북문을 지키던 아장(亞將)은 결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패왕은 이제 성나기보다는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한왕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패왕의 기세는 아직 하늘을 찌를 듯 살아 있었다. 곧 마음을 가다듬고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태산이 울리더니 겨우 쥐새끼 한 마리가 뛰쳐나온(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격이로구나. 유방이 겨우 제 한 몸 빼내자고 간밤 그리 소란을 떨었다는 것이냐?”

그때 다시 문루 위에 두 사람이 나오더니 그중 하나가 받았다.

“군왕이란 바로 우리가 무겁게 떠받들고 지켜야 할 천하이니 스스로 보중(保重)할 줄 알아야 하오. 한낱 무부(武夫)처럼 화살과 바위 덩이를 무릅쓰고 창칼 사이를 뛰어다니는 패왕과 어찌 견주겠소? 게다가 보옥을 품고 싸우면 오히려 그 때문에 싸우기가 거북해지는 법이오. 우리가 이 성을 지키는 데도 우리 대왕께서 성안에 계시지 않는 편이 훨씬 낫소.”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자세히 쳐다보니 방금 말한 것은 진평이었고, 그 곁에 빙긋 웃고 서 있는 것은 장량이었다. 자신을 속이고 한왕에게로 달아난 그들을 보자 애써 가다듬은 패왕의 마음이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꿩 대신 닭이라더니 너희들이 바로 그렇구나. 비록 유방은 달아났으나 너희들이라도 사로잡으면 분한 마음이 반은 풀리겠다. 기신과 주가는 태우고 삶았으니, 너희는 가죽을 벗기고 토막 내어 젓갈이라도 담가 주랴?”

그렇게 외치고는 아침부터 전군을 들어 성고성을 들이쳤다. 하지만 짐작하고 채비한 까닭인지 패왕이 그날 하루 종일 장졸들을 불같이 몰아대도 끝내 성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에는 싸움다운 싸움도 없이 손에 넣었던 성이었건만, 이번에는 어찌된 셈인지 사흘을 내리 몰아쳐도 끄떡없이 버텨 냈다.

거기다가 더욱 패왕을 성나게 하는 것은 그 사이에도 밤만 자고 나면 한군 장수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일이었다. 한왕이 달아난 다음날 밤에는 진평과 장량을 비롯한 책사(策士)들이 어디론가 빠져나갔고, 또 그 다음날 밤이 지난 뒤에는 다른 낯익은 장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엿새째 되는 날 마침내 성난 패왕이 앞장서서 다시 성고성을 우려 뺐을 때는 성안에 변변한 장수는커녕 군사들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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