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통신 비밀에 관한 한 이러한 믿음을 이제 우리 사회에선 접어야 할 것 같다. 최소한의 법적 규율에 의해 통신비밀이 보호되리라는 믿음은 최근 일련의 도청 사건에서 보듯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권위주의 편의주의적 사고(思考)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공무원이 남아 있는 한,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한 법률 규정의 강화가 우리의 사생활을 보장하는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도청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책임이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법적 관행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 도청 테이프의 공개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최근의 논란에서도 도청의 불법성과 도청 행위의 처벌 문제는 분명히 간과돼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양심선언으로 밝혀지는 도청 행위가 주로 공소시효가 지난 다음에야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현행 공소시효는 별 실효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도청 행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도청 행위 처벌에 관한 현행 7년 공소시효의 연장 문제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한 감청 절차의 개선도 필요하다. 범죄 수사나 테러 방지 등을 위한 감청은 앞으로도 허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요 범죄 수사에서 통신 정보가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국가안전 보장을 위한 목적’이라는 불명확한 표현 아래 통신제한 조치를 허용하는 입법 방식으로는 자의적 집행의 부작용을 방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대상 행위를 명확하게 하는 내용으로 법률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감청 허가 절차에서 법원의 영장발부 심사도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감청 허가를 위한 법원의 영장 발부와, 감청기간 연장 절차가 별로 어렵지 않았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은 사법절차 개선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인신 구속에만 엄격한 영장 심사를 요구할 게 아니라, 개인의 정보 노출로 인한 인격적 정체성의 구속에 대해서도 법원의 엄격한 심사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법적 근거 하에 행해진 감청 행위에 대한 사후관리 절차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정보수사기관 공무원들이 허용된 인적 대상 범위를 넘어 감청을 하거나 감청이 종료된 후에 당사자에게 통보하는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감청을 행하여 왔다고 한다. 현행 법 규정은 법에 의해 감청이 허용된 후의 사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다. 따라서 감청에 대한 사후 통제 체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제화가 보강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감청이 종료된 후 감청 결과에 대한 보고와 감청 대상자에 대한 감청사실 통보 절차가 이뤄졌는지 여부를 법원에 서면으로 통보하는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통신 비밀 보호는 정보화 사회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다. 정보화는 그 부작용을 두려워하여 진행을 멈출 수 없는 이 시대의 흐름이다. 차제에 통신비밀보호법은 집행상의 공백을 해결해 치밀한 법체계로 정비될 필요가 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보장은 통신 비밀 보장이라는 가장 낮은 단계부터 시작돼야 하는 것이다.
류지태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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