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47>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주발과 역상이 낙양과 공현에서 부풀린 군사를 데리고 돌아오고, 장량과 진평이 한왕 곁에 있게 되자 한군은 다시 세력을 크게 떨쳤다. 호기가 치솟은 한왕이 장졸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이 바로 하늘이라고 한다. 어서 오창을 빼앗아 우리 군민(軍民)이 먹을 곡식부터 차지하고 보자. 대군을 몰아 단숨에 성을 깨뜨려 버려라!”

그때 장량이 나와 말렸다.

“듣기로 오창 성안에는 늙고 힘없는 시양졸(시養卒)들과 형도(刑徒·죄지어 끌려온 군사)의 무리 몇 백이 지키는 시늉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왕의 군령이 엄하여 그들이 성안 백성을 이끌고 죽기로 지키면 적지 않은 군사가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꾀를 써서 성을 버리고 달아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군사를 상하지 않고 오창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일이 어디 있겠소? 무슨 꾀로 그렇게 할 수 있겠소?”

한왕이 귀가 솔깃해 장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량이 차분히 받았다.

“시양졸과 형도는 잘 싸우지 못할뿐더러 싸우기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우리 군사의 위세를 보여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항왕의 벌을 면할 구실을 주고 길을 열어 주면, 두말없이 성을 내주고 달아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이 싸울 엄두조차 먹지 못할 만큼 겁을 줄 수 있소?”

“오창 북쪽으로는 하수(河水)가 흐릅니다. 그 하수 가득 배를 띄워 물길로도 대군이 이르는 듯 꾸미고, 우리 10만 군사로는 성 동쪽과 남쪽을 뒤덮어 버리도록 하십시오. 적병이 성벽 위에서 동 서 남 세 곳을 돌아보면 절로 기가 죽을 것입니다.”

“항왕의 벌을 면할 구실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곡식을 가지고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직접 동문 문루(門樓) 앞으로 나가시어 적장을 부르신 다음 성안의 곡식을 가지고 비워 둔 서문으로 떠나도 좋다고 허락하십시오. 다행히 대왕께서는 백성들을 함부로 죽인 일이 없고 약조를 어긴 적도 없어 성안 군민들은 모두 그 말을 믿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초군(楚軍)들로 보아서도 곡식을 가지고 가면 항왕이 지키라는 것을 지킨 셈이 되니, 목숨은 건질 수 있습니다. 오창 성안에서 버티다가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기네 편이 든든하게 지키는 성고로 돌아가 항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곡식을 주어 보낸다면 우리가 오창을 차지하는 게 무슨 뜻이 있겠소?”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장량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오창 성안에 쌓인 곡식은 하수의 물길과 관동의 관도(官途)를 따라 천하에서 모여든 것입니다. 저들 늙고 약한 잡졸(雜卒) 몇 백 명이 가지고 가봤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쫓기는 마음이라 수레를 모아 싣고 간다 해도 백 섬(곡·斛)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고에 이르면 성안 군민(軍民)이 며칠 먹을 양식도 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듣고서야 한왕도 장량의 말을 알아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뒤 그날로 장졸을 움직여 장량이 하자는 대로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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