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념치킨을 사들고 집주인을 찾아가 잘 타일러 본다.”
―TV를 시청하시던 아버지께서 특별검사가 뭐냐고 물으신다. 헌법을 수강하는 당신의 대답은?
“아버지, 힘들게 돈 버셔서 등록금 대주시는데 정말 면목이 없어요.”
유난히 길었던 시간강사 시절, ‘방학=실업’이라는 걱정을 잠시 잊게 해 주었던 ‘명답안지’들이다. 성적은 가차 없이 ‘빵점’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일리가 없지 않다. 집주인의 요구에 어느 세입자가 대뜸 ‘○○법 ○조에 따라 고소’를 하겠는가. 쉴 새 없이 터지는 비리에 국민 혈세로 다시 특별검사라니 정말 면목 없는 일 아닌가.
법과 제도를 만들어 펼치는 것이 나라의 일이요, 나라의 법과 제도를 다루는 학문이 헌법학이지만, 그것이 만능이라는 사고방식은 경계해야 한다. 눈에 안 보이는 시장 법칙이나 한 길 깊이의 사람 마음은 종종 법과 제도의 ‘순진한 열정’을 농락하고 배반하기 때문이다. 나라에 정책이 있으면 백성에겐 대책이 있다고 했다. 정보와 담합으로 무장한 ‘강남 아줌마들’을 정부도 어찌 못하는 것이 바로 ‘합리적 선택’의 세계다.
지역감정을 풀자는 데 누가 반대하랴만,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이 능사일까.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제 확대는 정파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에 소수 극단세력의 발호를 막는 장치를 필요로 한다. 정당명부 방식의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독일에서 ‘5% 저지 조항’ ‘위헌정당 해산 제도’ ‘건설적 불신임 제도’ 등이 정치적 안전판으로 기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선거구제의 사표(死票)란 정치 안정을 위한 비용인 셈이다.
‘피의 광주’를 공산주의의 책동이라 주장하던 사람이 아직도 버젓이 활동한다. ‘아사(餓死)의 주체 왕국’을 두둔하는 사람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이념의 양 극단에서 비례대표제의 전면 도입이 초래할 ‘정당정치의 파편화’를 우리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정당 규율이 너무 강해서 대통령의 정국 운영이 어렵다는데, 정당별로 의석을 나누는 비례대표제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지 않겠는가.
세계에서 정치의 예측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상대다수대표제는 정당을 2개로 압축하는 경향이 있다’는 뒤베르제 법칙이 한반도에서는 충청도 땅 자민련에 걸려 넘어졌다. ‘직선 대통령은 적어도 40%는 득표한다’는 코스타리카의 40% 법칙은 36.6% 득표의 노태우 전 대통령 때문에 예외를 인정해야 했다. 법과 제도를 바꿔 문제를 풀려는 시도가 의도대로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대통령제는 수평적 제도적 권력 분립의 경직성을 수직적 인적 권력 공화(共和)로 완화하는 메커니즘이다. 권력이 ‘분립’된 이 기계장치를 돌리는 것은 인간의 ‘협력’뿐이다. 그 협력의 매개로 지연도 있고, 학연도 있고, 이런저런 인간적 매력도 작용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념에 너무 매달리지 않는 유연함이야말로 대통령제의 두 엔진, 입법부와 행정부를 탈 없이 돌려 주는 윤활유다. 국민은 대통령제의 논리를 이미 몸으로 깨치고 있다.
흔히 에스키모라 불리는 이누이트 족은 분쟁이 생겼을 때 노래 대결을 벌여 잘 부르는 쪽의 손을 들어 준다(이 노래 소송에는 ‘가수 변호사’도 등장한다). 북미 콰큐틀 인디언은 포틀래치라는 재산 파괴 경기를 통해 족장의 권력을 창출한다(제 집을 홀랑 다 태우면 ‘위대한 족장’으로 쳐 준다). 법과 제도의 왕국 미국에서도 소수파 대통령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의원님들 타이르는 데’ 쓴다. 반면 브라질의 소수파 대통령은 ‘데크레시모(decr´esimo)’라는 명령통치의 꼼수로 의회를 우회하려다 결국 실패했다.
세상에 법과 권력이 존재하는 모습이란 참으로 다양하지 않은가. 감정의 문제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지난 대선, 소주잔 기울이며 경쟁 후보와의 단일화에 합의했던 대통령에게서 국민은 희망을 보았다. 무더위의 막바지에, 생맥주잔이라도 나누며 고집불통 의원들 다시 ‘잘 타일러’ 보시라. 억지 노래 부르기나 멀쩡한 가산 부수기보다 훨씬 쉽고 생산적인 일이다. 올리려는 전세금을 반의반만 깎아도 성공 아닌가.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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