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성실하다거나 우직하다고 보아 줄 수도 있는 이 인물의 이런 행위에 대해 작가는 시종 풍자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는 바람직한 독자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좋은 책과 보잘것없는 책에 대한 기초적인 구분도 할 줄 모르면서 공연히 무용한 일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자기기만적 지식인의 한 부류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근면한 책 읽기는, 먼 고장을 그리워하면서도 작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연민스러운 습관의 발로에 불과할 뿐이다.
책에 대한 열정을 제외한다면 사실 이 독학자라는 과장된 인물이 보여 주는 태도에서 긍정적 측면을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책에 대한 숭배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서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보여 주는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의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의 경우 ‘세상에 대한 지배욕의 왜곡된 표출’이라는 점에서 독서의 참다운 즐거움과는 상관없는 행위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쓰러뜨려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그걸 읽는 일은 일정한 기간 내에 끝마쳐야 할 공사가 아니다.
독서에 비유가 동원될 필요가 있다면 정복이나 돌파 같은 전투적 용어보다는 사랑이나 향유 같은 에로스적 용어를 적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 점을 망각하고 공리적 측면에서만 책 읽기를 바라보게 되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엔 책과 더 멀어질 우려가 있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책을 계몽의 도구로 여기는 엄숙주의적 풍조나, 독서와 공부와 입신출세를 일직선으로 연결해서 생각하는 타성이 남아 있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또 우리 사회에서 여러 매체와 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독서에 관한 각종 캠페인 역시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가 주는 즐거움의 측면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한 편이다.
책은 왜 읽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즐거움 때문이다. 정보 습득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영상시대, 인터넷시대에 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서가 주는 쾌감, 선형으로 이어진 문자의 나열을 따라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경험이 주는 기대와 흥분과 절정의 쾌감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흰 종이와 검은 글자가 뿜어내는 페로몬(동물이 분비하는 화학물질의 하나로 이성을 유혹하는 작용이 있다고 알려짐·편집자)에 취해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저자에서 저 작가로 건너뛰며 한 세계를 주유하는 것은 술이나 청룡열차 혹은 할리우드 영화가 줄 수 없는 그만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따라서 진정한 독서의 맛은 일정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과업형 독서에서가 아니라 한가로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며 거니는 산책형 독서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는 일상의 의무나 강박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나태와 자기 방기를 요구한다. 자신이 선택한 책이라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은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읽다가 질리면 언제든지 내려놓고 다른 책의 속삭임에 귀를 열어 놓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직장인이라면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서점에 일단 들어가 보라. 학생이라면 친구나 연인을 만날 때 서점보다 더 좋은 약속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일단 그 안에 발을 들여놓아 보라. 역사 문학 철학 사회학에서 처세 요리 스포츠 광고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사방에서 그대를 유혹하며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책은 그대의 손에 들려 그대의 상상력과 지식욕에 의해 부풀어 오를 때 비로소 충만한 존재가치를 획득한다. 한 권의 책을 수태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대인 것이다. 이 가을, 은은한 책의 페로몬에 취해 보자.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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