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망실공비(亡失共匪)’는 북에서 남파됐다가 산속에 숨어 도망가지 않고 잊혀진 채 지냈던 공비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한에 자수하지도 못해 잊혀진 존재. 1960, 70년대에는 망실공비가 꽤 많았다.
‘망실재산’은 국가가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사기꾼들이 가로챈 국가 소유의 땅을 일컬었다.
‘망실법관’도 있었다. 인사에서 소외돼 시골을 전전하던 판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망실법관’이 다시 기억 속에 살아났다. 지난달 26일 취임한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 덕분이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전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국회의원들에게서 “존경하는 선배 법관이 누구냐”는 서면 질의를 받고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과 박대균(朴大均·79) 변호사를 적어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법조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초대 대법원장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존경하는 인물로 자주 꼽히는 인물이지만 박 변호사는 생소했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만 나와 법원 서기로 근무하다 1952년 판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되었는데 강원 원주시와 충북 제천시, 충남 논산시 강경읍 등 벽지의 지원(支院)에서만 근무했다. 판사 생활 20년 동안 대도시나 수도권 근처 법원으로 인사발령이 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그를 두고 당시 법조계에서는 “법원 인사 명부에서 사라졌다”는 뜻으로 ‘망실법관’이라고 불렀다.
그는 1971년 강경지원장을 끝으로 법복을 벗었다. 당시 강경지청의 김경회(金慶會·전 부산고검장) 검사는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망실법관의 비애를 ‘이제나 저제나 실오라기 같은 막연한 기대감 속에 기다리다 지쳐버린 동백아가씨’에 비유하면서 법원의 잘못된 인사로 유능한 법관이 사표를 냈다고 한탄했다.
이 대법원장은 그 무렵 강경지원 판사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박 변호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 대법원장은 박 변호사에 대해 “그분 이상으로 판사로서의 자질과 도덕성을 갖춘 분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의 말은 달랐다. 그는 대법원장이 자신을 그렇게 거론했다는 얘기를 듣고 “창피해서 혼났다”고 말했다. “그분이 대법원장만 아니라면 직접 만나서 나를 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사실과 다르게 거론하셨느냐고 묻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이 대법원장 취임식에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대법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취임 축하와 함께 ‘창피를 준 데 대해’ 항의의 뜻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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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나는 아무런 명성이 없는 사람이니 잊어 달라”고 했다.
망실된 명성, 잊혀진 삶. 어쩌면 그것이 더 큰 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성(名聲)이라는 것은 한낱 소음(騷音)에 불과할 수도 있으므로.
“자신의 명성이 자신의 진실보다 덜 빛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시인 타고르의 말이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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