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권희/‘전환시대’의 경제관료

  • 입력 2005년 10월 13일 03시 02분


과거 경제부총리들은 ‘바람막이’ 소리를 칭찬으로 여겼다. 선심사업 등 정치권의 요구를 물리치고 경제 논리를 지키는 ‘방탄(防彈) 역할’을 자임했다.

여당 측에 생색낼 기회는 주되, 경제팀이 졸지에 말을 바꾸지 않아도 되도록 정치적으로 타결하는 방식을 흔히 썼다.

지금 경제팀은 ‘코드 장관팀’이다. 소주세 인상 문제나 삼성 규제 방법론 등에서 약간 부딪치는 듯한 것을 빼고는 청와대와 이견(異見)이 별로 없다. 행정보다 정치가 강조되는, 색깔이 뚜렷한 노무현 정권에서 일하려면 당연한 것일까.

내년 예산안에서는 경제보다 정치가 더 크다. 생산성이나 효율, 경쟁력 확충보다는 사회 복지, 통일 관련 등이 중시됐다.

역대 정권은 표를 의식한 국책사업에서나 차이가 있었지, 성장 위주라는 점에선 같았다. 나라살림의 골격을 짠 경제관료들은 수지 균형을 맞추는 데 골몰했다. 이번엔 달라졌다.

생산적 복지가 아니라 나눠 주기 복지에 그치고 자칫 ‘복지 함정’이 생길 수 있다는 비판에도 복지 중시는 변함없다.

배달망이 정비되지 않아 지원금이 엉뚱하게 배달된 사례들이 잇따르자 보건복지부는 일종의 감시원을 둘 계획이라며 그 덕분에 고용도 늘어날 것이라고 대꾸한다. 경제팀의 반론, 아니 이견은 들리지 않는다.

8·31 부동산 종합대책 때도 그랬다. ‘상위 2% 부자를 겨냥한 초정밀 유도탄’이라는 중과세 방안은 경제 관료의 머리에선 나오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제 관료 출신이 아닌 청와대 비서들이 틀 짜기를 맡았다. 경제 관료들은 군말 없이 정책수단을 제공했다.

내년에도 재정은 적자(赤字)로 간다. 후손들에게 돈을 빌려와 나라 살림을 하는 셈이다. 4년 연속 세수(稅收) 부족이고 국가 채무가 급증세라면 경제논리로는 적자재정을 되풀이하기 어렵다.

적자재정엔 전제가 있다. 현재 세금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고, 돈이 더 있으면 더 잘 쓸 수 있으며, 국민이 직접 쓰는 것보다 정부가 받아 대신 쓰면 나라살림이 더 좋아진다는 조건이다.

지금 과연 그럴까. 정치 우선의 경제장관들의 이에 대한 소신은 무엇인가 궁금하다. ‘나라살림 지킴이’ 기획예산처는 정치권 상황이 아닌 국민 형편을 중시해 줄까.

감세(減稅) 논쟁이 한창이다. 정부 예산안에 한나라당이 세금은 9조 원, 씀씀이는 10조 원 줄일 수 있다고 치고 나왔다. 정부는 “감세는 고소득층에만 혜택이 있고, 감세를 해도 소비나 투자가 늘지 않으면 세수만 줄어든다”며 감세에 반대한다.

양측이 정치논리, 경제논리로 더 화끈한 논쟁을 벌여 누가 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는지 짚어보면 좋겠다. 현실 인식, 미래를 보는 시각도 드러날 것이다.

내년 사회안전망 예산이 확보되지 않자 이해찬 국무총리는 “국가의 중요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장관을 해임할 수밖에 없다”며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부처별로 예산 5%를 못 줄인다는 게 말이 되나. 그 정도 낭비성 예산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자신이 중시하는 사업 재원만 염두에 둔 호통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정치 계절은 계속되고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한다. 예산이든 세금이든 심하게 정치 바람을 타면 경제장관들이 막아줘야 경제가 산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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