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독립투사 박열 석방

  • 입력 2005년 10월 27일 03시 04분


“조선의 생활을 일본화하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처사이다. 조선을 무시하는 정책은 일시적으로 그들을 압박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히구치 도라노스케(통口虎之助)는 한 일본 잡지에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털어놓았다. 그는 “조선인 교화사업을 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고 하소연했다.

일본은 식민지정책에 반항하는 요시찰 조선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불렀다. 1920년 발행된 일본 내무성의 ‘조선인 개황’에는 “3·1운동 이후 불령선인들의 배일감정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고 적혀 있다.

박열(朴烈·1902∼1974). 그는 처음으로 일왕 암살을 시도한 조선인이었다. 일본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는 불령선인 중에서도 최고의 불령선인이었다.

박열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히토(裕仁) 당시 왕세자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동료의 밀고 때문이었다. 1923년 9월 3일 ‘일왕부자 폭살음모 사건’ 주모자로 경찰에 연행된 그는 대역죄로 도쿄 법정에 섰다.

당시 박열의 재판은 조선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법정에서 보여준 그의 당당한 언행과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의 관계는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박열과 함께 재판정에 선 가네코는 그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여인’으로 당시 조선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일본 형무소에서 무기징역을 살던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정치범 석방조치에 따라 감옥 문을 나섰다. 22년 2개월 만에 맛본 자유였다. 박열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였다.

그는 출옥 후 초대 재일 조선거류민단장을 지내다 귀국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돼 1974년 세상을 떠났다.

남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에서 눈을 감은 박열. 남북한과 일본을 관통하는 그의 삶의 궤적에는 20세기 굴곡진 한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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