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대표 유행가 ‘애수의 소야곡’ 1절이다. 격정과 회한을 내지르지 않고 ‘별’ ‘휘파람 소리’ 같은 시청각적 이미지에 빗대 절제하는 가사는 얼핏 ‘신파’로 보인다. 그러나 2년전 이 곡을 리메이크한 가수 한영애는 “명곡은 인간 내면의 절실한 표출이 비결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는 암울했지만 대중가요는 황금시대였다. 연극무대 막간에 불렸던 유행가가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개국(1927년)과 일본계 레코드 회사들의 앞 다툰 상륙으로 주요 문화상품이 되었다. 이애리수가 노래한 본격 조선 가요의 효시로 불리는 ‘황성옛터’는 5만 장이 팔려 나갈 정도였다.
이 시대 노래들은 검열 때문에 정치성을 띠지 못하다 보니, 슬픔 사랑 향수 방랑 같은 감성을 자극한 가사가 많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시공을 초월한 명가사의 비결이 된 측면이 있다.
당대 스타 작곡가로 박시춘(朴是春·1913∼1996)이 있다. 1931년 무명가수 남인수에게 준 ‘애수의 소야곡’이 빅 히트를 하면서 OK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발탁된 그는 모두 3000여 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했다.
신라의 달밤, 고향 만리,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있거라 등 지금도 장·노년층의 노래방 단골 메뉴인 주옥같은 노래들이 모두 박시춘의 곡이다.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에 아동 악극단에 반했다. 아예 가출한 그는 이후 시대를 대표하는 가인(歌人)이 된다. 1982년 10월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았던 그는 ‘나는 선생도 없고 제자도 없다’며 문하생을 마다한 자유인이었지만 연예인협회 이사장과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종신 명예회장을 역임한 대중 문화계의 권력자이기도 했다.
최근 그가 친일 노래를 지었다고 도마 위에 올랐다. 수천 곡 중 겨우 몇 곡인데 너무 야박하다는 평가도 있었고 짚을 것은 짚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논란은 논란이고 노래는 노래다.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 누구라도 그의 노래를 읊조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지 않으랴.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만은/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바람도 문풍지도 애달프구나.’(애수의 소야곡 3절)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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