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용택 씨가 국가정보원장으로 있던 1999년 9월 법무부 행정자치부 정보통신부와 국정원이 합동으로 ‘국민 여러분, 안심하고 통화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당시 3개 부처 장관은 김정길, 김기재, 남궁석 씨였다. 광고에는 ‘통화감청이 불가능한 휴대폰도 정부가 감청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번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졌지만 광고는 국정원이 휴대전화 감청장비인 R2 여섯 세트를 개발해 본격 운용한 시점에 나왔다.
▷R2는 통신회사의 유선중계통신망 회선에 감청장비를 연결해 그 회선을 통과하는 모든 유무선 전화를 감청할 수 있는 장비다. 국정원은 R2에 주요 인사 1800여 명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 놓고 상시(常時)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4개 부처가 합동광고를 한 시점이 R2 가동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무래도 석연찮다. R2 도청에 많이 걸리도록 하기 위해 휴대전화 사용에 대한 불안감을 완화시키려는 음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 정치인은 DJ정부 시절 사석에서 만난 김은성 국정원 차장에게서 “아무개 전화에 걸어 놓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국정원에서는 특정인에 대한 도청 개시를 ‘걸어 놓았다’고 표현했던 모양이다. 수천 대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걸어놓고서 ‘국민의 정부는 다릅니다. 휴대전화는 도감청이 안 됩니다’라고 광고를 낸 것은 가증스러운 사기극이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국민 여러분, 안심하고 통화했습니까? 덕분에 모조리 엿들었습니다’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을까.
황 호 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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