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釜山이 보여 준 ‘글로컬리즘’

  • 입력 2005년 11월 19일 03시 04분


부산이 고향인 최윤정(19·연세대 정외과) 씨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자원봉사자다. 부산시청에 마련된 콜센터에서 외국인들의 문의전화를 받고 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람차다. 단군 이래 최대의 외교행사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에서다.

최 씨는 지금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중심에 서 있다. 정확히 말하면 400만 부산시민 모두가 세계화(globalism)와 지방화(localism)가 만나는 최일선 현장에 서 있다. 양자의 합성어 ‘글로컬리즘’만큼이나 새로운 이들의 조우(遭遇)가 나와 내 고장 부산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지켜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글로컬리즘’은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뜻에서 ‘글로컬리제이션(glocalisation)’으로 쓰이기도 한다. 어느 경우나 적당한 우리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세계화의 주체(actor)가 민족국가(nation state) 단위에서 지방정부(subnational state) 단위로 확대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수년 전만 해도 세계화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몫이었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결정에 따라가면 됐다. 이제는 아니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보다 앞서서 ‘세계화’에 직접 참여하고 주도한다.

세계화로 먹고사는 국제자본으로서도 지방정부는 좋은 파트너다. 중앙정부의 권한은 지방정부로 대폭 이양되고 있고 규제는 느슨하다. 공장 용지, 공업용수, 도로 등 기간시설 제공과 세금 감면쯤은 기본이다. 구체적인 거래는 지방정부가 외국의 자본과 기업을 끌어들여 수출을 늘려 나가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부산처럼 영화제를 열거나 국제회의를 유치하기도 한다. 이처럼 지방정부와 세계화가 상호 교직(交織)함으로써 만들어 내는 국제정치경제의 새 트렌드가 곧 글로컬리즘이다.

부산은 APEC 정상회의를 통해 글로컬리즘의 성공 사례 하나를 추가했다. 중앙정부가 정상회의의 한국 유치에서부터 541억 원에 이르는 재정지원까지 여러모로 도왔지만 부산시민의 열렬한 참여와 지원이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평가는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부산시의 성공에는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는 물론 올해까지 10회에 이르는 국제영화제 개최를 통해 평소 축적해 둔 국제적 역량도 큰 힘이 됐다. 이 정도 실력이면 2020년 올림픽 유치에도 성공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전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부산시를 배워야 한다. APEC 정상회의 기간에만 외국인 투자 유치액이 5억 달러가 넘었다거나, 총비용이 2000억 원인데 생산과 부가가치 유발 효과가 5700억 원에 달한다거나 하는 것들에 주목하라는 게 아니다. 세계화와 지방화가 만나면서 이뤄 내는 글로컬리즘의 무한한 가능성에 눈을 돌리라는 얘기다. 중앙정부의 도움 없이 외국자본을 끌어올 수 있도록 의식을 바꾸고 실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국제정치경제 연구자 중에는 글로컬리즘의 부정적 영향을 지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국제자본과 지방정부의 연대에 기초하는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계급(global class)이 신(新)자유주의의 확산을 통해 패권적 블록을 구축해 나간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지방정부가 신자유주의 확산의 전초기지로 이용당하고 있고 중소 제조업체들은 자칫하면 국제자본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란 우려도 있다. 지나친 걱정이다.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세계 각국의 시장, 군수들이 무엇 때문에 오늘도 가방 하나 들고 세계를 누비겠는가. 부산에 온 21개국 정상과 각료들이 “제발 우리나라에 투자해 달라”며 목을 매겠는가.

세계화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이를 잘 이용해 고장의 발전과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꾀할 수 있느냐는 이제 지방정부의 몫이다. 중앙정부가 인심 쓰듯 공기업 몇 개 떼어 주는 식으로 될 일도 아니다. 외국자본이 둥지를 틀 정도면 국내 기업도 몰려오게 돼 있다. 지방정부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라면 유능한 외국인 CEO라도 시장 군수로 영입하겠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산 APEC가 주는 국제정치경제학적 함의(含意)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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