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출범하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국민적 예감이 적중할 가능성을 높여 준다. 위원 15명 가운데 영향력이 특히 큰 위원장 및 상임위원을 포함한 8명을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이 지명했다. 이들 위원은 노무현 정권과 역사 인식을 대체로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노 대통령과 여당이 보여 준 근현대사 인식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는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를 이루어 낸 대한민국 현대사를 외눈으로 바라보는 극단의 시각이다.
과거사정리위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위원들은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까지도 조사 대상으로 선정할 권한을 지닌다. 이들이 내린 과거사에 대한 결론은 법령, 정책, 교육에 반영되고 역사교과서를 바꾼다. 바로 그런 결론은 전체 위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내려진다. 대통령과 여당이 지명한 위원 8명이 동색(同色)이면 야당과 대법원장이 지명한 위원 7명의 견해는 무의미해진다.
위원장에 임명된 송기인 신부가 노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이며, 한국 사회를 ‘기득권과 반(反)기득권의 대결구도’로 바라보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상임위원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8월 세계한민족포럼에서 “한국 현대사는 청산돼야 할 세력이 권력을 잡아서 거꾸로 양심세력을 완전히 거세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기억을 조작해 온 역사”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정통성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산업화의 공(功)까지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역사관이 아닐 수 없다. 역시 대통령이 지명한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한국의 지배층은 미국의 지시를 받는 것을 가장 편한 방안으로 여겼다”며 현대사를 대미(對美) 의존의 역사로 규정했다.
일제강점기부터 6공화국까지 한 세기의 근현대사가 이들의 역사 인식 속에서 어떻게 재단될지를 예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짧게는 4년, 길게는 6년에 걸쳐 이들이 주도할 ‘과거사 정리’를 언젠가 재정리해야 할 날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력의 소모와 국가적 자해(自害)가 두렵다. 역사를 현실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정권이 역사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은 전례는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노무현 정권이 이러한 역사적 교훈에서 배운 바가 없다면 이 또한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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