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2월 9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여성당원대회에서 조지프 매카시(1908∼1957) 상원의원은 “미국 국무부 안에 당원증까지 가진 공산주의자 205명이 있다”고 폭로한다.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즉시 조사위원회가 소집됐지만 그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매카시가 갖고 있다는 리스트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단순 조사대상자 명단이었다. 이미 국무부를 떠난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소련의 핵 보유,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 미국 사회가 ‘적색 공포’에 시달릴 무렵이었다.
매카시는 1952년 상대방 후보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재선에 성공한다. 그해 공화당도 압승했다.
이후는 매카시의 세상이었다. 그가 ‘빨간색’으로 칠하면 상대방은 바로 공산주의자 낙인이 찍혔다.
정치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거짓말은 심해졌고 거짓말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매카시는 정부 언론 대학 예술계까지 미국 사회의 모든 곳을 들쑤셨다.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 얼마 못 가 대중이 그를 식상해 하기 시작했다. 미 육군에도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한 것은 장성 출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견책 움직임이 일었다. 상원의원으로서 무분별하고 무책임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자아도취에 빠진 매카시는 여전히 오만했다.
민주당에서 사과 성명을 내면 견책안을 철회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매카시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식들!”
1954년 12월 2일 미국 상원은 매카시 상원의원에 대해 견책을 결의했다. 65 대 22. 다수당이던 공화당 의원들도 대거 찬성표를 던졌다.
이름을 얻었던 것처럼 몰락도 순식간이었다.
알코올의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매카시는 2년 6개월 후인 1957년 5월 2일 세상을 떴다. 49세였다. ‘∼이즘’이라는 어미가 붙은 몇 안 되는 정치가의 말로치고는 비참했다.
그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인사들을 사면 복권했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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