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관련 해외 취재를 하다 알게 된 30대의 A 과장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가족과 떨어져 낯설고 물선 이국(異國) 땅에서 고생하면서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노력하던 열정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형형한 눈빛으로 수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목소리도 잊지 못한다.
SK네트웍스 이근필 상무도 전형적인 수출 전사(戰士)다. 1980년 ㈜선경에 입사해 홍콩 6년, 중국과 말레이시아 각각 3년 등 해외에서 12년을 보냈다. 특히 철강 수출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는 한중(韓中) 수교 한 해 전인 1991년 중국 근무를 시작했다. 혼자 중국 내 첫 한국 종합상사 지사를 다롄(大連)에 개설하고 북동부 하얼빈(哈爾濱)에서 남서부 충칭(重慶)까지 각지를 누볐다.
“영하 30도의 한겨울에도 가방 하나만 들고 다녔죠. 가방이 손에 쩍쩍 달라붙었습니다. 지금은 세계가 아는 포스코지만 일본 철강제품이 장악하던 당시 중국 시장에서 포항제철 이름을 대면 “포 뭐라고?” 하는 반응이 돌아왔죠. 하지만 이를 악물고 뛰어다니니 수출 길이 열리더군요.”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종합상사 직원들은 세계 각국 오지(奧地)까지 들어갔다.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 또는 극성은 때로 개인적 비극으로 이어졌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과로와 스트레스, 현지 풍토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한국 제품을 해외시장에 소개한 주역이었다. 대기업 주도의 수출 위주 전략은 무(無)에서 출발한 우리 경제가 세계사에 전례가 드문 압축성장을 가능케 한 결정적 원동력이었다. 추진 과정에서 일부 그늘도 있었지만 빛이 훨씬 두드러진다.
이렇게 하나씩 개척한 시장과 이미지는 이후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 됐다. 점차 제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품질도 높아지면서 1960년 4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의 무역 규모는 올해 1250배인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소득도 82달러에서 지난해 1만4000달러대로 뛰어올랐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잊어선 안 될 것이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정 수준의 풍요는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무역 확대로 상징되는 외부에서 왔음을. 국내외에서 피와 땀을 흘린 많은 수출 역군은 ‘제3차 산업혁명’으로까지 불리는 한국의 고도성장에 기여한 영웅이었음을.
“한국경제는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의 희생 위에 재벌의 실속 없는 밀어내기 수출로 외형성장에만 급급한 실패의 역사”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힘을 얻는 세상이다. 실증적 통계나 체험적 삶에서 모두 진실과 거리가 먼 이런 왜곡된 시각은 교육현장에까지 침투해 우리 아이들을 오염시킨다. 이 상무는 “때로 가슴이 답답하고 피를 토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르 강변에서 만나 스치듯 헤어진 A 과장의 심정도 그리 다르진 않을 것 같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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