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 날에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보지 못하였다.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질일 때…. 부지중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명의 구각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를 갈아입을 때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다’고 흥분하던 김진섭의 ‘백설부’를 읽으며 자란 나 같은 세대는 눈 오는 밤에 조용히, 안전하게 잠들 수가 도무지 없다. 발이 무겁게 젖어올 때까지 눈을 맞다 찻집 난롯가에 둘러앉아 다시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지켜보는 것이 눈에 대한 예의인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옹기종기 둘러앉는 난로란 게 없어진 지도 한참이다. 감수성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낀다. 만남의 방식도 달라졌다. 만남의 방식이 달라진 건 의사소통 기술들이 놀랍게 발달한 결과일 것이다. 난로나 아랫목이 없어지니 사람들이 밀착해서 둘러앉을 이유가 없어졌고 휴대전화 안 가진 사람이 없으니 굳이 얼굴을 마주하고 앉을 필요도 없어졌다. 공간 전체가 따뜻해지는 난방 방식, 흔해 빠진 휴대전화가 우리에게 반드시 득일까. 우선 나부터 따뜻함에 중독돼 눈 오는 거리를 전처럼 헤맬 수가 없어졌다. 콧등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소스라치는 환희인 건 추위를 느끼기 전까지일 뿐이다. 추운데 무슨 청승이랴 싶어 남들처럼 히터 빵빵한 차 안으로 얼른 도망친다. ‘창밖을 봐, 첫눈이 와’는 해마다 계절의 끝에 준비된 놀랍고 싱그러운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 말을 듣고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을 사람에겐 맥 빠진 비명에 불과하다. 추위에 대한 내성이 없어졌다. 그러니 오래 눈을 맞기는 글렀다. 눈을 즐기는 방식도 잗다래질 수밖에 없다.
다른 고통에 대한 내성은 있는가? 아니다. 아픔을 견디는 힘이 골고루 없어졌다. 눈 맞기만 글러 버린 게 아니라 이래서는 참고 견뎌야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기쁨을 모조리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이 너무 쉽다. 아무것도 아프지 않다. 그 무섭던 치과 치료까지 아프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거야 물론 백번 환영할 일이지만 통증을 참을 줄 아는 사람들이 줄어든 세상은 두렵다.
아이를 낳을 때도 제왕절개를 선호하거나, 일부러 청하지 않으면 진통을 생략해 버리는 무통분만이 흔하다고 한다.
며칠 전 전철 안, 내가 탄 칸에 앉은 10대와 20대는 하나같이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 중이었다. 바로 곁에 앉은 이가 누군지 안중에 없을 것은 물론이었다. 저렇게 긴급한 용무들일까.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에다 들이는 시간과 공력 대신 마음 턱 놓고 하는 소통방식이 단지 편해서 그런 건 아닐까. 만남은 기쁨임이 확실하지만 실은 긴장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끊임없이 눌러대는 문자 메시지와 컴퓨터 화면의 소통이, 실제 사람의 표정과 체온과 숨결만 할까. 디지털 신호가 그걸 대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도 아깝고 하도 귀해 추위와 더위를 막아 주는 건 기본이고 구체적인 통증이나 고통을 맛볼 기회까지 모조리 뺏어 버린 게 아닐까.
성숙엔 아픈 체험이 필수다. 아파야 의연할 수 있고, 아파야 겸허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픈 시간을 견뎌 내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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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짐하게 첫눈이 왔다. 사람이 잘 산다는 건 삶의 매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는 거라고 확신한다. 그 음미에 ‘쓴맛’이 빠져서는 말짱 허사다. 쓴맛 없이는 단맛도 없다. 인생 최고의 기쁨은 역시 사람끼리 눈빛과 숨결과 온기를 나누는 데 있다. 거기 설령 통증이 따라오더라도! 한 해가 다 가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은 친구가 여럿이다. 정말 바빠서 그랬을까? 나의 나약함을 반성한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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