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화단 관계자들은 올해 최고의 전시로 이화여대 박물관(관장 윤난지)이 기획한 ‘시간을 넘어선 울림-전통과 현대’전(5월 31일∼7월 30일)을 꼽았다. 또 올 한 해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작가로는 장르별로 한국화에 박병춘(46), 서양화에 김홍주(60), 설치에 전수천(58) 최정화(44) 씨를 각각 꼽았다.
이 같은 결과는 본보 문화부가 최근 전시기획자, 화상(畵商), 미술관장, 평론가, 작가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나온 것. 설문에 답변한 사람은 모두 29명이었으며 문항 수는 6개였고 무응답이거나 2개 이상의 답을 한 경우도 동등하게 설문에 포함시켰다.
▽올해의 전시=‘시간을…’전은 전통과 현대예술을 성공적으로 접목해 시공을 넘나드는 한국예술의 힘을 보여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전통산수화, 도자기, 서예, 목 공예품, 복식 등 30여 점의 유물과 △전통을 계승하려는 작가 △전통적 소재를 활용하는 작가 △전통을 패러디하고 파괴하고 변형하는 작가 등 40여 명의 다양한 현대 작품을 대비시켰다.
또 서울 종로구 평창동 토탈미술관 ‘당신은 나의 태양’전(10월 15일∼12월 8일)과 중구 태평로 로댕갤러리 ‘나라 요시토모’전(6월 17일∼8월 21일)도 공동 2위에 뽑혔다. 중견 전시기획자 이영철 씨가 기획한 ‘당신은…’전은 굵직한 현대사의 고비마다 미술가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가를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전시해 한국 현대미술에 바친 기념비적 오마주(경의)라는 평을 들었다. 만화 캐릭터 같은 악동을 등장시켜 현대인의 내면을 그린 일본 작가 ‘나라 요시토모’전은 전시 기간에 무려 8만5000여 명이 관람한 올 최고의 대중 전시로 꼽혔다.
▽올해의 작가=한국화 박병춘, 서양화 김홍주, 설치 전수천 최정화 씨가 각각 꼽혔다. 한국화의 박 화백은 쉼 없는 실험정신으로 주목받고 있는 화가. 올해 갤러리 쌈지와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면서 한국화의 현대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9월 로댕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김 화백은 가는 아크릴 붓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세밀화로 회화의 본질을 묻는 진지한 작업을 일관되게 해 온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설치 분야에서는 미 대륙 횡단철도 프로젝트를 선보인 전 씨와 키치 미술을 선보여 온 최 씨가 공동 1위에 올랐다. 사진 분야에서는 한국적 서정이 담긴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 조각분야에서는 큐브작업으로 현대조각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을 듣는 김주현 씨에게 표가 몰렸다.
▽해외 활동이 두드러졌던 작가=전 장르를 통틀어 1위는 설치작가 서도호(42) 씨가 꼽혔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는 올해 미국 일본 영국 이탈리아 등 세계 12곳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가장 활동이 두드러졌던 신인=20대 신진작가로 앙증맞은 소인국 풍경 같은 설치작업을 선보이는 함진(28) 씨가 1위에 올랐다. 한국화 서양화에서는 3회 이상 추천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표가 갈렸다.
▽올 한해 가장 활동이 두드러졌던 공간=미술관으로는 리움 미술관과 사비나 미술관이, 상업화랑으로는 국제갤러리가, 대안공간으로는 사루비아 다방이 많은 추천을 받았다.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과 인물=공간으로는 리움 미술관이, 사람으로는 충남 천안시 아라리오 갤러리 대표 씨킴이, 집단으로는 민예총과 미술인회의가 각각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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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올해 미술계 특징은▼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올해 미술분야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대교체와 비주류의 등극’이라 할 수 있다. 거장 원로의 이름은 간곳없고 30, 40대 신진작가들이 급부상했으며 공간도 대형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벗어나 대안공간이나 박물관 등으로 바뀌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불어 닥친 탈 권위와 세대교체 바람이 미술계에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 결과다.
우선 올 최고 전시로 박물관 전시가 꼽힌 점이 이채로웠다. ‘박물관 전시=소장품이나 유물 전시’라는 통념을 뛰어넘은 ‘시간을…’전은 이제 국내 화단도 마케팅이나 홍보보다 기획력 하나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국내 사립미술관의 대모격인 토탈미술관도 주목을 받았다. ‘당신은…’전에서 보여준 힘은 이 미술관의 늙지 않는 실험정신과 27년 연륜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는 평을 들었다. 이렇다 할 홍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평을 받은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좌장 공간으로서 신뢰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올해의 작가들과 약진한 신인들을 꼽는 설문에서는 화단에 부는 여러 가지 변화를 한꺼번에 짚어 볼 수 있었다. 데뷔 시기에 관계없이 대부분 30, 40대가 언급되어 바야흐로 젊음이 ‘권력’이 되었음을 화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언급되는 작가의 수다. 장르별로 언급되는 작가 수가 20여 명에 육박할 정도로 표가 분산됐다.
전통적인 회화 장르에서 몰표가 없었던 데 비해, 사진작가 배병우 씨와 조각가 김주현 씨에 대한 주목은 의미 깊다. 미술의 변방이라 할 사진에 대한 위상 강화(배병우)와 작가에겐 전시뿐 아니라 세미나 등을 통한 담론 형성(김주현)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대안공간의 눈부신 활약은 이제 이들이 비주류가 아니라 미술계의 권력 안으로 들어온 주류공간임을 입증했다. 큐레이팅의 일관성 유지로 전시공간의 개성을 확립하고 있는 사루비아 다방이나 전시와 아카데미, 세미나를 연계한 전시담론을 창출하고 있는 대안공간 풀이 특히 추천을 많이 받았다.
상업화랑을 꼽는 질문에서 가나, 현대 등 대형 화랑이 빠진 것도 이채롭다. 이중섭 위작 사건, 신진작가 발굴보다는 원로와 인기 작가에 치중한 점이 미술계의 신뢰와 사랑을 잃은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또 과소평가된 작가를 묻는 질문에서 서양화가 정복수 씨가 3회 추천으로 1위가 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가나다순)
김달진(김달진미술연구소장) 김무영(목암미술관 대표) 김선정(2005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총감독) 김윤옥(금호미술관 큐레이터) 김종근(미술평론가) 노승진(노화랑 대표) 박영택(미술평론가) 서도호(작가) 송인상(예술의 전당 큐레이터) 신정아(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양옥금(갤러리 쌈지 큐레이터) 염혜정(아트포럼뉴게이트 대표) 유석우(미술시대 주간) 유진상(국제갤러리 큐레이터) 윤진섭(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이건수(월간미술 편집장) 이관훈(사루비아 다방 큐레이터) 이동재(아트사이드 대표)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이승미(제비울미술관 학예실장) 이홍은(한미사진미술관 큐레이터) 임근혜(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임창섭(미술평론가) 정준모(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장) 채민진(카이스갤러리 큐레이터) 최열(가나아트센터 기획실장) 최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최정화(작가) 하계훈(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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