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조그만 도시에 세계 최초(1932년)로 인공설(人工雪) 배양에 성공한 나카야 박사의 ‘눈 박물관’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냥 귓전으로 흘렸습니다. 며칠째 지치지도 않고 내리는 눈 때문에 마음엔 아무런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길모퉁이에서 불쑥 나카야 박사의 생가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밑에는 초석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초석 위에 쌓인 눈을 쓸어냈습니다. 거기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雪は天から送られた手紙である.’ 눈은 하늘에서 보낸 편지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왜 원고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원고지의 그 네모난 칸 속에 그 말을 한번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나카야라는 과학자가 왜 눈을 ‘하늘에서 보낸 편지’라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일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안 사실이지만 나카야 박사가 눈을 하늘의 편지라고 한 것은 눈의 결정(結晶)을 들여다보면 눈송이가 태어나고 성장한 하늘과 구름의 비밀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서체, 똑같은 사연을 가진 편지가 없듯이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내리는 그 많은 눈송이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대기 중에서 1초마다 1000조 개의 ‘눈 싹’(결정)이 만들어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눈에 영혼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합니다.
어젯밤 세밑 모임들을 뒤로하고 원고지와 마주 앉았습니다. 만년필의 해묵은 잉크도 갈았습니다. 많은 기억이 스쳐 갔습니다. ‘고문기술자’를 방불케 하는 취재 폭력을 휘두르고도 ‘부적절한 취재윤리’ 운운하는 MBC PD수첩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솟았고,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하면서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원고지를 내려다봤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원고지를 대하니 마치 벅찬 세상을 만난 듯했습니다. 쓰던 원고지를 뜯어내고 다시 쓰기를 거듭했습니다. 문득 조그만 깨달음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이 원고지가 바로 하늘이 내게 보낸 편지일지 모른다는…. 원고지의 칸을 하나둘씩 메워 가는 동안 분노는 스러지고 평화가 내려앉았습니다. 알 수 없는 ‘정화의식(淨化儀式)’을 치르는 듯한 은밀함도 느껴졌습니다.
행간(行間)으로 ‘잠들면 소록도 꿈’을 꾼다는 마리안 수녀의 미소도 어렸습니다. 마리안 수녀가 사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는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녀에게 소록도 주민들의 소식은 하늘에서 보낸 편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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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엔 1cm 안팎의 눈이 온다고 합니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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