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목표들은 일견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뭔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노벨상이 물리, 생리의학, 화학, 문학, 경제, 그리고 평화라는 분야에서 인류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단히 권위 있는 상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노벨상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젊은이들에게 전문지식과 교양 교육을 잘 받게 해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에 공헌케 한다는 교육 본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명문 대학에 들어가 졸업장을 따게 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돼버린 한국 교육의 파행적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상을 받는 것이지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닌 이치와 같다.
더군다나 노벨상의 각 분야가 인간사에 중요한 모든 부분이라고 할 수도 없다. 노벨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수학, 철학, 공학, 종교, 언론, 예술 같은 것이 덜 중요한 분야인가? 예를 들어 수학에는 필즈메달이 있고 종교에는 템플턴상이 있다.
석연찮은 시상도 있었다. 예컨대 평화상의 경우 시어도어 루스벨트, 야세르 아라파트, 메나헴 베긴, 레득토 등은 아무리 봐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들이 못 받은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인류 역사에 찬연히 남는 문호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라이너 릴케, 헨리크 입센이 문학상을 받았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수상하지 못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보다 더 ‘우월한’ 작가인가? 일본인들은 오히려 시바 료타로를 국민작가로서 더 좋아한다. ‘설국’을 유려한 영어로 번역해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노벨상 수상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오히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를 더 훌륭한 일본작가로 여겼다. 어차피 문학은 매우 주관적인 분야이고, 노벨 문학상은 스웨덴의 한림원이 주는 일개의 상이지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상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는 노벨상을 국가 목표로 삼는 이상한 나라가 돼버렸다. 물론 북한 같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들도 노벨상의 권위를 인정한다. 하지만 온 국민이 여기에 목매고 사는 나라는 거의 없다. 약소국으로 살아왔던 아픈 기억 때문인지 이제는 남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우리의 사회심리에 그 원인의 일부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평화상은 이미 받아서인지 이제 관심이 과학 분야와 문학 쪽으로 쏠리고 있다.
한국을 뒤흔들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복제 스캔들과 작년 문학상 수상을 놓고 벌어졌던 작은 해프닝도 우리 사회가 노벨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묘한 조급증에서 연유했을지 모른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팀의 핵심이었던 한 교수는 최근 배아줄기세포 파문에 대하여 “노벨상을 의식해 지나치게 조급하게 생각”해서 생긴 현상이라는 얘기를 했다 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미 그토록 ‘숙원하는’ 노벨상을 하나 갖고 있으니 이런 조급증을 버려도 될 것 같다.
그것을 받은 분이 평화와 인권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벨 평화상 수상이 한반도 평화에 그렇게 큰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은 위대한 경제학자지만 그렇다고 인도 경제가 세계 초일류는 아니다. 어쨌거나 이제 노벨상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노벨상은 영광스러운 상이다. 노벨상을 받는 한국인이 계속 나온다면 정말로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직도 노벨상을 받는 것이 국가 목표인 촌스러운 상태를 탈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규형 명지대 교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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