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문홍]북한 신년 사설의 3가지 허구

  • 입력 2006년 1월 2일 03시 00분


북한 주민이 불쌍하다. 어제 나온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갖게 되는 소감이다. 1만3000여 자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 중 어느 것 하나 거짓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런 글을 읽어야 하는 북한 사람들의 처지는 얼마나 고단할까.

북한 당국이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3개 신문 명의로 신년 공동사설을 발표한 것은 1995년부터다. 바깥 세계는 이를 통해 그해 북한의 대내외 정책노선을 짐작해 왔다. 올해 공동사설을 보고 전문가들은 북한이 군사력 강화, 내부 결속 강화, 남북관계 지속 등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북한 지도부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세 인식의 편협성과 오류, 주장의 허구성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첫째, 현실을 호도하는 자화자찬이 서글프다. “선군 기치 밑에 우리 식 사회주의의 위대한 번영의 시대를 열어나가는…”으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가 그렇다. “혁명 수뇌부의 세련된 영도가 있기에 우리 조국과 민족의 앞길에는 끝없이 휘황찬란한 전망이 펼쳐지고 있다”는 두 번째 문장에선 참담해진다. ‘휘황찬란한 전망’이라니, 주민들을 굶어 죽게 만들고, 학정(虐政)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게 하면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까.

둘째, “인민생활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선군(先軍)을 강조하는 뜻이 의심스럽다.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조차 남한과 국제사회에 손을 벌리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판에 무슨 돈으로 “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겠다”는 것인가. 미국의 금융 제재로 ‘뒷주머니’까지 막힌 상황이니 주민에게 가야 할 것을 군대로 빼돌리겠다는 얘기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선군’을 말하면서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것도 모순이다.

셋째, 그러면서도 주민 통제에는 열심이다. “사회주의 제도를 좀먹는 온갖 이색적인 요소들이 추호도 침습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이 그렇다. 요즘 북에선 남한 비디오를 돌려 보는 것이 큰 인기라고 한다. 남에 온 탈북자가 북으로 휴대전화를 거는 일도 드물지 않다. 북 당국은 탈북자를 잡아들이고 외부 정보 유입을 막아서 이런 대세를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북 당국으로 하여금 이처럼 터무니없는 ‘신년구상’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게 하는 물적, 정신적 기반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주통일, 반전평화, 민족 대단합의 3대 애국운동이 올해 조국통일운동에서 들고 나가야 할 구호”라고 밝힌 대목에 그 비밀이 있는 듯하다. 지난해처럼 올해도 남한을 물자 보급기지에다, 미국의 핵 포기 압력을 막는 방패막이로 삼을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6월 15일을 ‘우리 민족끼리의 날’로 정하자는 대목에서도 ‘남한 정부 길들이기’에 대한 북의 계산을 엿볼 수 있다. 이러다가 사설의 주문대로 남쪽에 ‘반(反)보수대연합’까지 결성된다면 북 당국은 ‘남한 접수에 절반은 성공했다’고 자평하지 않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권한다. 민족을 볼모삼아 천리(天理)에 반하는 독재체제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우리 정부에도 묻는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 북한의 술수에 언제까지 이용만 당하고 있을 것인지를. 북한 신년 사설을 읽으면서 이래저래 마음이 착잡하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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