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생이라는 것도 뜻대로 되기보다는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체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사람이기도 하고 또 바라는 것, 꿈이라는 것은 이룬 것보다 항상 크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땐 정말 속이 상한다.
여러 사람 중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주목을 받게 될 땐, 그 사람이 나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나한테 운이 안 따라서 그리된 것 같다. 내가 한 일이 기대만큼 인정받지 못하거나 평가받지 못할 때 역시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내 자신이 부족해서 일어난 결과라고는 정말로 인정하기가 힘들다. ‘자아성찰’보다 ‘회피’가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그런 걸까.
긴 여행에 지친 나그네가 어느 날 우물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신(神)이 나타나 쯧쯧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낮잠을 자다가 우물에 빠지게 된다면 너는 네 어리석음을 반성하기보다는 ‘왜 신은 내게 이렇게 불운을 안겨 주느냐’며 나를 원망하겠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이다.
2005년의 유행어 중에 “너나 잘하세요”라는 것이 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방금 죄수복을 벗은 여주인공 금자가 “죄짓지 말고 살라”며 두부를 내미는 전도사에게 싸늘하게 내뱉는 대사다.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그 일을 곱씹다가는 마침내 상대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한마디씩 쓴소리를 했다. 싱거운 농담처럼 시시때때로 말이다.
그러나 “너나 잘하세요”라며 남에게 ‘잘하기’를 요구하기 전에 나부터 ‘잘하기’를 실천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볼 일이다. ‘너’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 혹시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무책임, 나의 의표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잘되면 제 복,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책임을 회피하고 보자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 곰곰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반성하기보다는 남의 탓, 혹은 그저 나에게는 단 한번도 행운을 주지 않는 운수를 원망하며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때의 나는 대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자신감이라는 것은 항상 외부적인 사건들에 의해 좌우되는 불안정한 구조 위에 있는 것일까.
한 가지 더. “너나 잘하세요” 이런 말을 쓰거나 이런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수단은 역시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동적이던 내 행동이나 사고가 이 같은 언어를 통해 정리되고 고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
굳이 천주교에서 내건 운동의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네 탓이오”가 아니라 “내 탓이오”라고 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고 보니 수십 년 전의 선각자들이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할 때도 실천으로 책임감을 갖고 각자의 일에 매진하라는 뜻이었나 보다. 기본과 원칙과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는 그런 사람 하나하나가 만들어 내는 것일 게다.
어라, 눈 깜짝할 새에 새해도 벌써 두 주가 지나고 있는 참이다.
조경란 소설가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