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여름 금강, 겨울 금강

  • 입력 2006년 1월 23일 03시 03분


금강산에 다녀왔다. 2000년 7월 처음 다녀온 지 5년 6개월 만이다. 지난번에는 대형 관광선을 이용해 동해항에서 북의 고성항까지 13시간이나 걸렸으나 이번엔 버스로 남측 고성 출입사무소에서 불과 15분여 만에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남북의 ‘정신적 거리’ 또한 그만큼 좁혀졌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998년 11월 18일 처음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래 ‘퍼주기 논란’에도 불구하고 100만여 명의 남측 관광객이 금강산에 다녀왔고, 이를 통한 신뢰가 다른 남북경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여름 금강산과 달리 겨울 금강산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봄에 금강(金剛), 여름에 봉래(蓬萊), 가을에 풍악(楓嶽), 겨울에 개골(皆骨)로 불리는 사계절 명산이지만 눈 덮인 겨울은 따로 설봉(雪峰)으로 불린다. 이번에 본 것은 글자 그대로 벌거벗어 속살이 다 드러난 겨울 금강, 개골산의 모습이었다. 옥류동(玉流洞) 계곡물이 옥색(玉色)으로 얼어붙은 것이 놀랍고 신비로웠다.

산은 그대로지만 주변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초창기 북측 출입사무소로 사용됐던 건물은 ‘고성항 횟집’으로 바뀌었고, 호텔과 펜션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들어섰다. 휴대전화를 반입할 수 없고 인터넷도 할 수 없지만 호텔에서 남측 공중파는 물론 케이블 TV까지 실시간대로 시청할 수 있다. 조간신문도 당일 오후면 배달된다. 평양 옥류관 금강산 분점도 생겼다.

올 9월에는 고성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골프장이 들어선다. 2007년 6월경에는 한꺼번에 1000여 명이 동시 상봉할 수 있는 이산가족면회소가 준공된다.

5년 전에는 산에 다녀올 때마다 출입 수속을 거친 뒤 고성항에 정박된 관광선에서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만물상 등산로 입구의 ‘금강산여관’을 현대가 리모델링한 금강산호텔에서 북측 봉사원들의 서비스를 받아 가며 느긋하게 숙박했다.

대웅전이 말끔하게 복원된 신계사에는 조계종에서 파견된 스님 두 분이 인근 숙소에서 출퇴근하며 불사를 돌보고 있었다. 스님들을 ‘중 선생’으로 불렀던 북측 인사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스님’이라고 부른다.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였다.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동포들은 이젠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고, 남측 관광객들 또한 북한 주민을 더는 ‘뿔 달린 괴물’로 보지 않는다. 단지 목탄차, 소달구지, 밥 짓는 연기, 꼬챙이 썰매, 기상나팔 소리 등을 통해 그들의 일상(日常)을 짐작할 따름이다.

북측 안내원들의 표정과 말씨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북측 안내원이 절경에 취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남측 관광객들을 보고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하며 슬그머니 넘어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역시 ‘남한 정세’였다. 사립학교법 개정 파문과 지방선거 전망에서부터 “유시민은 왜 그렇게 남쪽에서 인기가 없습니까” “정동영과 김근태는 왜 그렇게 지지율이 차이가 납니까”라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 낸다.

5년 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한번도 듣지 못한 것은 오히려 위안이 됐다. 남과 북은 피차 그렇게 쉽게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며, 빠른 통일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특히 보람 있었던 것은 북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30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온 일이다. 아버지의 명함판 사진을 관광증 안에 넣어 금강산 곳곳을 보여드렸다. 훗날 아들 손자와 철원에서 내금강을 잇는 옛 금강산선 열차로 장안사역에 내려 깔끔한 민가에 묵으면서 가을 금강, 풍악산을 마음껏 둘러보고 싶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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