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이연]느낌으로 살아보기

  • 입력 2006년 1월 25일 03시 11분


시(詩)가 길어지고 있다. 요즘의 시는 낯선 제목에다 얘기가 길고 기법이 복잡하며 소재가 엉뚱하다. 한두 줄의 시나 낙서 같은 쉬운 시는 인터넷 글짓기방에 들어가 보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시를 쓰기로 했나 보다. 길고 어렵게…. 그리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가 여러 번 읽어야만 이해가 될까 말까 하게 쓴다.

그런 시를 다 읽고 나면 ‘아름답다’거나 ‘좋다’라기보다는 어지러운 앙금이 고인다. 하지만 그 시는 머리 안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다가 한가한 틈을 비집고 나와서 나를 흔들며 존재를 알린다.

이미 문학은 독자의 입맛에 따르지도 않고, 독자 수준을 생각지도 않고 자기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세계는 시인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일 수도 있다.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 사람만이 그 세계를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기의 경험으로 아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퇴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학습으로 얻은 지식이나 삶의 지혜로도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다. 그래서 ‘감성본위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쓰나미(지진해일) 사태에서 보듯, 세상에는 지진이나 가뭄 혹은 폭우 등 재앙이 올 것을 미리 알고 피하는 미물(微物)이 많다. 그들은 다가올 위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몸에 와 닿는 파장으로 안다고도 하고 그들의 DNA 속에 기억의 지도가 있다고도 한다.

우리한테는 짐작이라는 좋은 말이 있지만 설명하기 어려울 때 그냥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 십 리쯤 될 거야.” “한나절은 걸릴 거야.” “한소끔 끓여서 건져내야 해.”

십 리가 반드시 4km는 아니다. 거기에다가 ‘쯤’이라는 애매한 여분이 더 붙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나절이란 하루 낮의 반을 의미하는데 하루 낮의 길이를 몇 시간으로 잡는 것일까. 한소끔은 또 몇 초 동안일까. 이처럼 애매한 잣대로도 옛날 사람들은 불편 없이 살았다.

지금 우리는 과학과 정보기술(IT)이 주도하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를 잘 이용하면서 눈치껏 살고 있는 사람들을 똑똑하다고 말한다. 정보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들은 언어와 수학이란 수단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요즘 언어와 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더 많다는 걸 깨닫고 만다.

이라크에서 무기와 전략이 우수하면 승리한다는 전쟁의 원칙도 조각이 나 버렸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변하고 튀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보수주의자가 늘어 가고 있다는 건 또 무얼까. 그렇다면 설명할 수 없는 그 부분은 느낌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 분석하고 숫자로 표시되는 것으로 답을 구하는 방법에서 자연의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느낌’이 필요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느낌으로 살기’란 말을 새로 만들어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새해가 꽤 지났지만 남은 날짜가 여전히 많다. “잘 안 되면 어쩌지”보다는 “어쩌면 잘될 것 같은데”라는 느낌으로 올해를 살면 어떨까.

김이연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