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어리석은 민주주의’와 ‘현명한 독재’

  • 입력 2006년 2월 7일 03시 05분


언변이 탁월한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후 토론문화가 활성화된 데다 인터넷의 급격한 확산까지 겹치면서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말의 홍수에 빠진 느낌이다. 인터넷 보급 초기에 미국의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가 지구상에서 대의정치(代議政治)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한 예언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실증되고 있는 듯하다. “국민이 현대적 전자기술을 통해 직접 의사 표시를 하게 됐으니 의회를 통한 대의정치는 무의미해졌다”는 그의 논리대로 인터넷 누리꾼들이 만들어 낸 여론은 이제 통치에까지 영향을 주고 사회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해졌다. 소수의 엘리트가 이끌어 간다는 선진국 사회보다 한국이 훨씬 민주적인(?) 국가가 된 것이다.

말잔치 시대에 사람들은 좋은 글 읽기보다 인터넷 댓글 달기에 바쁘고 남의 말 경청하기보다 내 말 하기에 급하다. 정치 경제에서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대중이 전문가처럼 일가견을 내세우는 데 익숙해졌다. 전문가가 아닌 대중이 어떤 상황이나 사안을 판단할 때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개입되기 쉽다. 수가 많다고 정답일 수 없는데도 단지 다수이기 때문에 막강한 여론이 되었던 예로 아직 진상 규명이 덜 끝난 황우석 서울대 교수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의 강남북 학군을 통합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텔레비전 토론에서 전문가들은 통합이 오히려 강북 학생들에게 불리하다는 의견이었지만, 전문가도 아니고 당사자도 아닌 지방 시청자들의 훈수성 여론이 통합에 압도적 찬성이었던 것도 비슷한 경우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선 요즘 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데 맹신적 대중 여론이 위험한 이유 중 하나는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는 점이다. 히틀러에게 열광하던 독일 군중이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놀아났던 홍위병 무리가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나쁜 역사를 남긴 사례들이다. 예로부터 독재자나 질 낮은 정치인들은 지식인이나 전문가를 싫어하고 대중을 이용하려는 본능이 있다. 현 정권 인사들의 행태가 그와 닮아 가는 것은 아닐까. 청와대가 고유한 홈페이지 외에 민간 포털 사이트마다 블로그를 만들어 직접 대중 설득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현 정권은 대중의 다수결적 여론 효과를 교묘하게 이용해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것 같다. 경제는 평등과 균등을 지향하는 성향의 다수결적 영향을 받을 때 치명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2%의 국민과 나머지 지역에 살고 있는 98%의 국민 간에 부동산 세금을 놓고 벌어진 인터넷 논쟁에서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강남 주민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세금의 절반 이상을 부담하는 소득수준 상위 5%의 부자 또는 그 부자들이 경영권을 갖고 있는 기업의 재산을 전 국민에게 균등하게 나눠 주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를 인터넷에서 다수결로 묻는다면 결과는 얼마나 이성적일까. 우리나라의 세금 정책이 지금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정부가 옳지 않은 다수결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옳지 않은 짓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말처럼 단지 민중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하는 일도 나쁘지만 민중을 이용해서 일을 하려는 것은 더 나쁘다. 역사상 가장 잘못된 다수결의 하나는 예수를 못 박기로 한 민중재판이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세워 놓고 물었을 때 그의 열두 제자를 제외한 대다수 군중은 강도 대신 예수의 처벌을 외쳤고 결국 그는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했다. 이렇듯 군중은 어리석을 수 있고 다수결은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의사결정을 소수결(少數決)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수결을 따라야겠지만 그것이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돼 있는데 주권이 있다는 것은 실수할 권리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민이 그 실수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했다면 이제 선거에서의 선택은 좀 더 이성적이어야 할 것이다. 실수가 반복되다 보면 대중은 자칫 ‘어리석은 민주주의’보다 ‘현명한 독재’를 그리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규민 경제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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