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홍]시작은 따뜻했으나…

  • 입력 2006년 2월 11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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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운 계절에 ‘세한도(歲寒圖)’를 보면 정말 마음이 시리다. ‘추운 세월을 그린 그림’답게 찬바람이 화폭을 휘돌아 나오는 듯하다. 하지만 그림 한쪽에 적혀 있는 화발(畵跋·편지)엔 ‘사람의 한결같음’을 생각하게 하는 따뜻한 사연이 담겨 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이 아닌,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을 대하기를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는구나.”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해 그려 보낸 불후의 명작이다. 당시 추사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제주에서 5년째 유배 중이었다. 세상의 인심은 차갑게 변했지만 이상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제자의 한결같음을 추사는 화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변신이 화제였다. 말투며 옷차림이며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엔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같은 변신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유의 변신은 전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변신을 이야기할 때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의 결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유 씨로 상징되는 권력집단 내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드러내 온 내면의 변모를 생각해 본다.

‘꽃 같은 처녀가 매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하숙비가 부끄럽고’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학생을 눈물 어린 눈으로 숨어 지켜보다’(유 씨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운동권 학생이 됐다는 따뜻하고 여린 청년은 수년 뒤 무고한 시민을 ‘프락치’로 오인해 감금하고 폭행한 사건의 주역이 됐다.

물론 두 ‘유시민 군’이 지향하는 민주화라는 외적 가치는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끌고 가는 그 내면의 연료는 ‘따뜻함’에서 이미 ‘분노와 증오’(정의감에서 비롯된)로 질적 변이를 일으켰던 게 아닐까.

정의감이 그 뿌리였던 따뜻함과 자기절제를 잃은 채 세속의 힘을 갖게 되면 거칠 것이 없게 되는 것 같다. 최근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이 언론에 유출되자 재정경제부 국장이 전격 보직 해임됐다. 밉보였던 검찰 간부는 승진에서 탈락했다. 반면 7일 개막한 전 노사모 대표 명계남 씨의 모노드라마는 이미 6일치나 예약이 매진됐다. 인터파크의 예매 순위에선 8일 저녁 9시 현재 46위에 불과하지만 4, 5개 대기업이 100장씩 대량 구매해 준 덕분이다.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염량세태(炎凉世態)에 편승하는 소소한 사례들을 계속 지켜보노라면 운동가 출신 권력자들의 변모의 끝은 어디일까를 가늠하기 어렵다.

초심(初心)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마음의 결까지도 잃지 않는 그런 한결같음이란…. 스승의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울면서 답장을 썼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고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이기홍 문화부 차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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