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피플 파워’로 들끓었던 마닐라 시의 에드사 대로(大路)는 지금 해외고용센터가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몰아낸 뒤의 희망과 자신감은 분노와 실망으로 바뀐 지 오래다. 2001년 또 한번 피플 파워가 부패한 대통령 조지프 에스트라다를 내쫓았지만 현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도 같은 혐의로 몰리고 있다. 이제 필리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바보 같은 짓’으로 여긴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부패나 부정선거보다 빈곤에 더 지쳐 있다는 것이다.
▷불안한 정정(政情)은 필리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1898년 재산 있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진 탓에 금권(金權)은 지역토호에게 집중됐다. 정치인들은 정당보다 리더에게 줄을 서지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선거비용을 뽑으려면 부패와 탈세는 필수다. 마르코스 축출 뒤 5년간 1000건의 법률을 만들었던 의회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고작 76건을 처리했다. 피플 파워가 터져 나온 것도 정치가 국민을 대변하지 않아서였다.
▷1950년대 초만 해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의 3배였다. 지금은 우리의 10분의 1 정도다. 정치가 민생을 돌보지 않으니 인프라는 형편없고, 세금도 걷히지 않고, 정부 부채가 쌓일 수밖에 없다. 국내외 투자가 살지 않으면 당장 일자리가 없어진다. 배곯지 않으려면 해외에 나가 남의집살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해외에서 설움받는 ‘한국인 가정부’를 만들지 않으려면 정치싸움에 지새울 시간이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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