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이대로 둘 것인가]<2부>선진국에서 배운다

  • 입력 2006년 3월 23일 03시 04분


《지난달 1부 ‘손질 없인 복지 없다’는 제목으로 5회에 걸쳐 국내 연금 개혁의 문제점과 쟁점을 짚은 데 이어 2부로 ‘선진국에서 배운다’를 연재한다. 이를 위해 본보 특별취재팀은 독일 프랑스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 칠레 등 7개국을 찾아 관련 부처, 연구기관, 대학, 기금운용기관, 노동조합 등의 주요 인사를 인터뷰했다. 취재 결과 선진국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활을 걸고 연금 개혁을 추진 중이었다. 대부분 최근 몇 년 새 어렵게 연금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향후 일정을 공개하면서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지 않고는 국가 시스템 자체가 붕괴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남부의 전원도시 박스홀름. 주민 호칸 얀손(78) 씨는 한 달에 2만7000크로네(약 378만 원)를 연금으로 받는다. 매년 해외여행을 즐길 만큼 여유 있는 금액이다.

그러나 얀손 씨 부부는 “자식들은 우리만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한다.

얀손 씨는 근로소득의 80%를 연금으로 받지만 1998년 단행된 연금 개혁으로 자녀들의 연금이 근로소득의 50∼60%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이처럼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을 비롯해 각국 정부는 지지도 하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연금 개혁에 매달리고 있다.

이번 해외 시리즈 취재 과정에서 만난 세계 각국 연금 전문가들은 “연금 문제는 나라마다 사정이 달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서도 “한국 연금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의 국민연금이 곳곳에 커다란 구멍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 왜 개혁에 매달리나

선진국들이 연금 개혁에 나서는 직접적인 배경은 ‘저출산 고령화’ 추세와 이에 따른 재정 위기 때문이다.

단적인 사례가 프랑스다. 프랑스는 1960년대 중반에만 해도 현직 근로자 5명이 노인 1명을 먹여 살렸다. 40년 만인 2005년에는 근로자 1.8명이 노인 1명의 연금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2035년에는 이 비율이 1 대 1까지 떨어진다.

프랑스 노후연금관리공단의 국제관계 담당관인 폴 올리브 씨는 “과거 체제를 그대로 가져가다가는 연금뿐만 아니라 의료보장 등 사회복지 전체가 마비된다”면서 “가장 반발이 심했던 노동계도 이제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퇴직 후 기대(예상) 수명’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970년 11년에서 2004년에는 17.1년으로 늘었다. 이 밖에 △프랑스 10.8년→21.4년 △독일 10.5년→18.9년 △일본 8.5년→14.8년 △이탈리아 13.1년→20.6년으로 늘었다. 다른 국가들 대부분은 거의 2배로 늘었다.

이에 대해 스위스 생갈대의 게바르트 키르흐게스너 교수는 “변화하는 인구구조에 적응한 연금구조 개정은 이제 시작 단계”라면서 “늦으면 늦을수록 개혁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고령화 추세 외에 △베이비 붐 세대의 본격적인 퇴직 △장기화되고 있는 저(低)성장 구조 △고(高)실업률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직업간 소득 변화 등으로 연금은 지속적으로 손질해야 할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 어떤 방향으로 가나

각국의 사정은 달라도 연금 개혁의 방향은 비슷하다. 무엇보다 ‘발등의 불’은 재정 문제다.

그래서 기존보다 보험료를 더 내거나, 급여를 덜 받는 방식으로 고치는 중이다. 또 그동안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 왔던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을 일반 국민연금과 일원화하고 있다.

국가 지원을 줄이고 노후생활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큰 흐름이다.

2004년 독일의 연금 개혁에 직접 참여했던 만하임대의 악셀 뵈르슈 슈판 교수는 “독일 사람들은 개인연금을 ‘카푸치노 위에 얹힌 크림’ 정도로 시시하게 여겼으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개인이 노후 대비에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일본은 2004년 보험료 수준을 대폭 높인다는 개혁안을 통과시킨 뒤 올해 3월에는 연립여당이 그동안 특혜라는 지적을 받아 온 국회의원 부조연금(의원연금)을 폐지했다. 2007년에는 일반 근로자들이 가입하는 후생연금에 비해 20%가량 유리한 공무원연금을 하나로 통합하는 법안을 제출한다는 계획을 잡아 두고 있다.

연금의 민영화 성공 모델로 꼽혀 온 칠레도 민영화 제도의 허점을 보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스발도 안드라데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은 “이달 11일 취임한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정부는 연금 개혁을 3대 과제 중 하나로 선정했다”면서 “연금 민영화의 소외지역인 저소득층에 좀 더 많은 혜택을 주고 민간 기금운영기관을 더 늘려 경쟁이 이뤄지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한국에 대한 조언은

해외 전문가들은 자국의 연금 개혁 경험에 비춰 한국의 연금 개혁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일본종합연구소 니시자와 가즈히코(西澤和彦) 주임연구원은 “세금으로 기초연금을 실시하는 것은 공평하고 매력적이지만 재정 부담 때문에 꺼리는 것은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일본처럼 어정쩡한 개혁을 하지 말고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제대로 된 연금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슈판 교수는 “한국도 10∼20년 안에 닥칠 노인들의 빈곤 문제와 재정 문제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부과 방식의 기초연금을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스웨덴 미래학연구소의 토마스 린드 연구실장은 “젊은 세대는 자신들에게 먼 장래 문제인 연금에 대해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나 무관심과 이에 따른 개혁 지연의 피해자는 바로 그들”이라고 말했다. 젊은층이 연금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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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바이서“여건 더 나쁜 한국, 손질 왜 미루는지…”

“한국만큼 연금 개혁이 시급한 나라도 드물어요. 조사와 연구가 충분한데 왜 행동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정책국의 수석분석관인 모니카 크바이서(43·여·사진) 씨는 한국의 연금 개혁 지연을 우려했다.

그는 “한국의 연금 여건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이중으로 나쁘다”고 말했다.

한국은 연금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고령화가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크바이서 씨는 OECD에서 손꼽히는 연금 개혁 전문가다.

독일인인 그는 세계은행, OECD 등에서 연금 분야만 20년째 맡고 있다. 최근 연금 개혁에 나선 미국 정부와 의회가 그를 초청해 의견을 듣기도 했다.

2000년 한국에도 다녀간 그는 한국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크바이서 씨는 “노령 빈곤층을 위해 기초연금 도입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재정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적립금이 한곳에 쌓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연금 적립액이 2032년 무려 1700조 원에 이를 것을 지적한 말이다.

크바이서 씨는 “거액이 들어오고 나가는 창구가 사실상 한곳(정부)이어서는 곤란하다”며 “연기금을 여러 개로 쪼개서 다양한 주체가 관리하고 운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금제도 밖에 있는 ‘사각지대’ 문제의 해법으로 그는 “여성 근로를 늘리고 부유층 자영업자를 제도권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세금, 연금, 의료보험료 등의 납부 기준 소득을 단일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크바이서 씨는 의료보험료의 일부를 연금으로 사용하는 독일의 사례를 제시했다.

연금은 미래에 대한 준비여서 회피할 수도 있지만 의료보험은 당장 필요하므로 가입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은 이 같은 점을 이용해 가급적 모든 사람이 연금을 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는 선진국 연금제도의 가장 큰 변화로 ‘국가 책임에서 개인 책임으로의 전환’을 꼽았다. 노후에 공적 연금으로 부족한 생활비는 개인이 알아서 준비하라는 것.

그는 2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개혁이 지연될수록 한국이 치러야 할 혼란과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반병희 차장 bbhe424@donga.com

▽일본 칠레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프랑스 스웨덴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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