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낭만주의자였던 남자는 가난했지만 당시의 관례대로 약혼식을 거쳐 결혼에 이르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피앙세’라 부를 수 있고, 처가의 사랑도 듬뿍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혼자 몸으로 목사와 군인을 잇달아 사위로 맞은 장모의 생각은 달랐다. 셋째딸만큼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번듯한 집안의 남자와 성대하게 맺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은 ‘가난한 집의 홀어머니 모시는 장남’과 결혼하겠다며 막무가내였다.
장모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약혼식 없이 바로 결혼식을 치르라며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남자는 섭섭했지만 장모의 뜻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양가의 가장이 오래전 세상을 떠나 결혼식장은 대부분 신랑 신부의 친척과 친구들로 채워졌다. 신랑은 혼자 리셉션 라인에서 하객을 맞았고, 신부는 친척 어른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왔다.
결혼 이후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고 약혼식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도 당시의 상황에 미련을 갖고 있다. 처가에 가 한잔 걸칠 때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보란 듯이 성대한 약혼식을 올려 줄 겁니다”라며 장모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결혼식장에서 혼주(婚主) 내외가 리셉션 라인에서 길게 늘어선 손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것을 볼 때면 “아이들 시집 장가보낼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직장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남자는 어느덧 장성한 아들과 딸을 어떻게 짝지어 줄까를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다. 제 한 몸 노후 대비도 제대로 못한 처지에 무슨 자식 걱정까지 하랴마는 부모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근검절약을 입에 달고 살지만 자식 결혼식만은 무리를 해서라도 잘해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일까. 결혼식에 갈 때마다 진행 식순 주례사 피로연 등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질 못한다. 특히 특급 호텔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결혼식에 가게 되면 부러움과 착잡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저 많은 하객과 엄청난 경비를 과연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당당하게 딸을 에스코트해 식장으로 들어서는 ‘성공한 아버지’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지위와 풍부한 재력을 배경으로 학벌이나 외모가 조금 처지는 자식을 좋은 상대와 짝지어 주는 혼주에게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 적도 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청첩장을 보낸 뒤 “축의금 대신 신문사 부국장 타이틀이 적힌 화환이나 하나 보내 주소”라는 전화를 해왔을 때 가슴이 짠했다. 돈보다는 남의 눈이 더 의식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아버지들은 현직(顯職)에서 성대한 혼사를 치르고 싶을 테지만, 보통 아버지들은 그저 직장이라도 있는 상태에서 자녀들 자존심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결혼식을 치러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중고교 시절 은사 한 분은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지만 정년까지 교단을 지켰다. 언젠가 “돈 좀 있으면 뭘 해. 그래도 자식들 결혼시킬 때는 애비 직업이 교사나 공무원 정도는 돼야 사돈댁에 체면이 서. 그래서 힘들어도 학교에 나오는 거야”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딸 셋을 둔 선배 한 분도 직장을 그만두면서 자기 앞날 걱정보다는 “아이들 결혼할 때 식장이 썰렁할까 봐 제일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잖아도 고단한 우리 시대 모든 애비들의 심정일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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