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박근혜와 한명숙

  • 입력 2006년 4월 1일 03시 00분


박근혜와 한명숙, 제1야당 대표와 국무총리 후보자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한 의원이 국무총리에 내정된 것은 “이 땅의 딸들과 딸을 키우는 분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라고 했다. 여성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총리에 오르게 되는 데 대한 덕담(德談)이다. 여당의 본심은 김한길 원내대표가 드러냈다. 그는 “한 분은 절대 권력자의 딸로 살아온 분이고, 한 분은 절대 권력자에 대항해 고통과 핍박을 이겨 낸 분”이라고 했다.

김 대표의 말에는 한국사회의 두 축(軸)인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간 불화(不和)와 적의(敵意)가 응축돼 있다. 여기에 보수와 진보란 이분법적 호명(呼名)이 작동하면 세상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이 곧 진보는 아니다. 하물며 ‘진보=선(善), 보수=악(惡)’은 더더욱 아니다. 나쁜 진보와 나쁜 보수는 모두 악일 뿐이다. 문제는 나쁜 진보일수록 민주화를 팔고, 나쁜 보수일수록 산업화를 자기들이 도맡아 온 것처럼 떠든다는 것이다.

한 총리 후보자는 지난해 10월 ‘강정구 파문’ 때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자 “유신독재에 대해 한마디 사과 없이 무슨 염치로 국가 정체성 운운하느냐”고 비난했다. 이 말에서도 국가 정체성에 대한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 간 인식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임은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절대 명제(命題)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거저 이뤄진 것은 아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부독재는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했다. 그 점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반(反)민주 독재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부 극단 좌파세력을 자생(自生)시켰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유보된 채 이루어진 산업화가 민주화의 토대가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와서 민주주의 하면서도 산업화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재현(再現)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 오늘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국가정체성에 이른 것으로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유일의 분단체제에서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하며, 어설픈 좌파 정권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혼란마저 부추기는 듯한 현실이다.

이제 산업화세력이든 민주화세력이든, 보수든 진보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이나 반체제적 일탈(逸脫)에는 한목소리로 ‘안 된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재자의 딸’이 무슨 국가 정체성을 입에 올리느냐는 ‘한풀이 식’으로는 갈등과 분열만 가속화될 뿐이다.

이미 진부한 얘기가 됐지만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잘못은 역사의 이행 과정을 인정하고 그 바탕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공고(鞏固)히 할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오늘의 성취마저 부정하며 과거 파헤치기에 몰입한 것이다.

양극화, 교육문제 등에 대한 태도도 같은 맥락이다. 성장 없는 분배가 가능하지 않으며, 경제성장 자체도 잠재성장률을 밑돌고 있다면 성장 우선에 분배 조화로 가닥을 잡는 게 당연하다. 지식정보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세계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한 영재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끝내 평준화에 매달려서는 나라의 미래 경쟁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모든 사안에 뒤집기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고집하는 것은 과거를 부정하고자 하는 뿌리 깊은 비주류 의식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박 대표는 정략적으로 한 총리 후보자의 발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한 총리 후보자는 국회 인준을 받는 즉시 박 대표를 찾아가기 바란다. 만나서 서로 손을 잡고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해원(解寃)하고 선진화의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방법과 절차에 이견(異見)이 있더라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는 한마음이라는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모처럼 한 시대에 배출된 두 여성 지도자가 보여 줄 수 있는 ‘모성(母性) 정치’의 진수(眞髓)일 터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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