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카레라이스’와 ‘라이스카레’

  • 입력 2006년 5월 1일 03시 03분


지난해 말경이다.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이 자기 당의 얼굴인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를 비난했다. 돌출 발언이 아니었다. 당 내부의 정서를 대변했다는 말이 옳다.

“아무리 당의 대표라고 해도 당론과 어긋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자민당과 민주당이 ‘카레라이스’와 ‘라이스카레’처럼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같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마에하라 대표는 누구인가. 지난해 9·11총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세대교체 분위기를 업고 전격적으로 당 대표가 된 신진 정치인이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선수(選數)와 나이를 따지는 일본 정계에서는 파격이었다. 그만큼 민주당은 다급했다. 그러나 당의 구원투수로 옹립한 당 대표가 다른 문제도 아니고, 당의 정체성을 흔드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마에하라 대표의 ‘당론과 어긋나는 발언’이란 자위대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자민당의 ‘염원’과 똑같다. 오죽했으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마에하라 씨는 자민당과 가까운 점이 많은 인물”이라고 했을까.

최근 한일 간에 격랑이 일고 있다. 진원지는 일본의 집권 여당인 자민당이다. 당의 두 간판인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우리로서는 최악의 콤비다. 이들은 한국과 잘 지내기 위해 ‘굽은 소신’을 바로 펼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데는 (우리의 잘못은 잠시 접어 두자) 제1야당인 민주당에도 책임이 있다. 자민당의 외교 독주를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임 오카다 가쓰야 대표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과 중국을 끌어안아야 한다며 아시아 중시 외교를 강조했다. 야당의 견제는 그 자체가 집권당에 부담을 준다. 일본이 ‘한통속’이라는 이미지도 희석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마에하라 민주당’은 자민당에는 ‘종이호랑이’였다.

마에하라 대표는 ‘미니 고이즈미’ ‘일본판 네오콘’이라는 별명만 얻은 채 취임 6개월 반 만에 중도하차했다. 직접적인 이유는 ‘가짜 e메일 폭로사건’에 책임을 진 것이지만, 당의 정체성에 흠집을 낸 데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도 그의 퇴진을 재촉했다.

마에하라 대표의 퇴진은 민주당으로서는 뼈아픈 실패다. 40대 정치인을 내세워 개혁과 변화의 이미지를 선점하려던 시도는 빗나갔다. 그 결과는 ‘관록으로의 회귀’였다. 민주당은 자민당 간사장 출신인 백전노장 오자와 이치로(63) 의원을 새 대표로 선택했다. 자민당의 대안세력을 자임하는 민주당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벌써부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3년 만에 보선 승리를 이끌어 내자 ‘오자와 효과’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울상이던 민주당은 오자와 대표 덕분에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다. 오자와 대표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의 이미지가 좋거나 당내 정치를 잘해서가 아니다. 자민당과 각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뉴스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고이즈미 총리에게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야스쿠니 문제가 한중일 외교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으로 볼 때 그의 요구는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민주당의 부침은 야당의 생존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어느 국민도 ‘카레라이스’와 ‘라이스카레’ 둘 다 원하지는 않는다. 달라야, 그것도 제대로 달라야 눈길이나마 끌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달도 채 안 된 ‘오자와 민주당’의 앞날을 점치기란 어렵다. 그러나 ‘오자와 민주당’이 ‘마에하라 민주당’보다는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난달 한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56%가 ‘오자와 대표에게 기대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고이즈미 내각 지지율과 똑같은 수치다.

남의 나라 야당을 생각하는 동안 우리나라 야당이 떠오른다. ‘웰빙 정당’ 한나라당은 제대로 야당 역할을 하고 있는가.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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