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 자금난으로 섬유회사를 접은 뒤 야반도주하다시피 한국을 떠났던 그였다.
해외에서 재기에 성공한 그는 경기 평택시에 다시 공장을 내기로 하고 옛날 직원을 찾아 나섰다. 지난달 초에는 20여 명의 ‘옛 동지’들과 단합대회를 겸해 동해안을 다녀왔다고 한다. 눈물 반 소주 반인 술잔을 기울이며 그동안 겪었던 서러움과 원망을 서로 털어놓다 보니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더라는 것이다. 화재로 검게 타버린 낙산사 뒤뜰에서 노랗게 피어난 복수초를 발견했을 때는 지나온 자신의 역정이 겹쳐지면서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얘기 끝에 그는 영국의 대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미국 조지아 주 서배너에서 겪었던 ‘눈물의 기차여행’을 꺼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3월 서배너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창립총회가 열렸고, 이때 케인스는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
케인스는 IMF 창설을 사실상 주도했다. 그가 구상한 IMF는 파운드와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삼고, 본부를 미국과 영국이 아닌 제3국에 두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기축통화-달러, IMF본부-워싱턴이었다. 경제 대국 미국 앞에서 케인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기차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고, 영국을 재기시키겠다는 꿈을 접은 채 분에 못 이겨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 세월 O 씨가 겪은 서러움이 ‘서배너의 케인스’와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실패한 젊은 기업가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하게 지냈던 외국 파트너들이 한국에 보내는 싸늘한 시선은 ‘모멸’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때 O 씨는 결심했다고 한다. 케인스는 죽음으로 영국인들의 분발을 촉구했지만, 자신은 기필코 회사를 다시 일으켜 형제와 가족, 그리고 이웃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겠다고. 그래서 옛날 직원을 다시 모아 공장 문을 열게 됐다는 설명이다.
케인스 시절 영국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 경제가 쉽지 않다.
국제유가는 나날이 오르고, 원-달러 환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각종 경제연구기관이 내놓는 경제 성장 전망치 역시 우울하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대표적 기업 중 하나인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 각종 비리로 구속됐다. 경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겪어야 하는 진통이라 하겠다. 시련 속에 피어났기에 더욱 아름다운 복수초처럼 선진 경제강국이 되기에 앞서 한국 경제가 치러야 하는 수험료인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에 일부의 잘못이 다른 기업에 대한 반(反)기업 정서의 확산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개별 기업의 안살림까지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은 경제 순결주의에 빠질 때 시장은 왜곡되고 국가경쟁력은 약화된다. 아르헨티나가 그랬고 브라질이 그랬다.
시장경제는 완전무결한 제도가 아니다. 현재의 잘못을 고쳐 나가는 ‘보정(補正)의 과정’을 통해 건강하게 진화해 가는 ‘현재진행형 제도’다. 비판받아야 할 대기업 총수도 있지만 오늘도 ‘낮은 곳’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O 씨 같은 기업인도 많다.
반병희 사회부 차장 bbhe424@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2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