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 축구는 대단했다. 한일 월드컵 4강 신화(神話)를 썼다. 그 이전의 다섯 차례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팀이 2승 1무로 조별 예선을 통과하고 16강, 8강전에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제쳤다. 온 국민이 ‘축구의 포로’가 될 만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축구가 달라진 것은 분명했다.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기억의 잔상(殘像)효과’ 때문일까. 얼마 전 한 여론조사기관이 한국의 독일 월드컵 예상 성적을 물었더니 8강이라는 응답이 42%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16강 35%, 4강 진출도 12%나 됐다. 조별 예선 탈락이라는 대답은 4%에 불과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이건 ‘예상’이 아니라 ‘희망’이다. 온 나라가 축구에 빠져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 같다. 예비군들이 한국팀 경기 스케줄과 동원훈련 일정이 겹친다고 불만을 토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국방부와 병무청이 이를 받아들여 훈련 일정을 조정한 것이 과연 정상인가.
한국 축구를 다시 보자. 세계 축구는 지금 공격보다 수비에 더 무게를 둔다. 월드컵 초기에는 공격 위주의 4-2-4가 주류를 이뤘으나 4-3-3, 3-5-2를 거쳐 요즘은 4-4-2가 대세다. 중원(中原)에서부터 상대를 거세게 압박하는 전술이다. 4-2-4가 유행일 때는 게임마다 4골 이상 터졌으나 최근 2.5골로 떨어진 것도 이런 흐름의 결과다. 그런데 한국은 다름 아닌 수비라인에 문제가 있다. 결정적 약점이다.
그제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도 ‘협력 수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프리카 팀 특유의 리듬에 말려 맥없이 뚫리고, 뚫지는 못했다. 박지성 이영표 이을용 김남일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들어간다고 금세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수비의 핵심은 개인기보다도 다른 선수들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2006년 대표팀에서 2002년 대표팀의 ‘기적’을 읽고 있다. 그러나 사정은 딴판이다. 이번에는 만만한 게 하나도 없다. 미리 가서 시차(時差)는 극복한다지만 단기간에 눅눅한 독일 잔디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경기장 분위기도 판이할 것이다. 떠올리기 싫지만, 한국은 지금까지 유럽에서 열린 월드컵에 세 차례 출전해 1무 7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8강, 4강을 점치고 열광하는 것은 ‘거품’이다. 지나친 기대는 선수들에게 되레 부담을 줘 경기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물론 공은 둥글다. 폭스 스포츠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TV 중계를 예고하면서 이런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에게 어떻게 잡아먹히는지, 그걸 확인하는 목격자가 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반복되지 않는 법이다. 이번에는 16강도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은 대표팀이나 국민 모두 4강 신화에서 깨어나야 한다.
송대근 논설위원 dk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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