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권재현]실학에서 찾는 21세기 한국의 길

  • 입력 2006년 5월 25일 03시 03분


이념 과잉의 현실에 대한 염증 때문일까. 국민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새로운 구호로 떠오르고 있다.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의 호 다산을 이름으로 내건 단체가 많아지는 것도, 실학축제가 열리고, 실학박물관까지 지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학계의 실학 연구는 퇴조하고 있다. 한국실학학회 회장인 송재소 성균관대 교수는 동아일보가 마련한 한중일 실학좌담에서 “1990년대 불붙은 중국과 일본의 실학 연구 열기에 비해 한국의 실학 연구 열기가 시들해졌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한중일 실학 대담에 참석한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한국의 실학 연구가 많은 자극을 줬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중국에서는 실학의 전통을 이학(성리학), 심학(양명학)과 함께 송대에 정립된 3대 유교사상 조류로 규정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한국에서 실학이 현실에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는 ‘실용성’이라는 세속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농후한 반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21세기를 이끌 새로운 사상이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학의 특징으로 실용성, 실증성 외에 ‘진실성’을 강조한다든가, 지식과 실천의 일치, 관념과 물질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실학을 조명하려는 작업은 총체적 사상, 즉 철학으로서의 실학에 무게를 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실용’하면 실학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최신 연구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 ‘메타피지컬 클럽’은 우리가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번역하면서 그 심오한 사상을 얼마나 단순화했는가를 깨닫게 해 준다. 이 책은 노예 해방을 둘러싼 치열한 이념 대립이 가져온 미국 남북전쟁의 참사 속에서 이념과 신념의 이름으로 생명까지 빼앗는 현실에 대해 당대 최고의 법학 철학 심리학의 지성들이 치열히 맞선 고발정신의 산물이 곧 프래그머티즘임을 보여 준다.

‘실용’이라는 두 글자에만 가려 있던 프래그머티즘의 진가가 종교적 원리주의의 충돌로 고뇌하는 21세기 미국에서 관용의 사상으로 새롭게 조명되듯이 한국의 실학도 이념의 공리공론으로 뒤덮인 한국의 현실을 돌파할 새로운 사상체계로 재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권재현 문화부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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