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주지 않는 속 좁은 선거법은 고쳐져야 한다. 특파원 근무에 앞서 연수차 머문 일본의 TV는 공동개최국 경기를 중계하는데 어찌나 인색하던지.
조국의 정치 열병, 축구 열풍에 한몫 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비싼 항공료를 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목격한 한국의 선거는 서울 청계천 근처의 거리 풍경만큼이나 낯설었다. 4년의 공백을 메워 볼 요량으로 2002년 6·13지방선거 다음 날 신문을 찾았다.
6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은 ‘민주 참패…한나라 압승’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으로 선거 결과를 알렸다. 정치권 격변이 불가피하며 반년 후 대선 구도에 변화가 예상된다는 대목에 시선이 머문다.
“아, 그렇군. 그 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 우리는 6개월 뒤에 제16대 대통령을 뽑았다.
지면 오른쪽엔 중국 베이징 발(發) 탈북자 뉴스와 월드컵 소식이 위 아래로 들어서 있다. 중국 공안이 한국 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를 연행한 뒤 한국 외교관까지 무차별 폭행했다는 얘기를 듣고 도쿄에서 분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국을 상대로 한 ‘탈북자 줄다리기’의 출전 선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교체될 참이지만 탈북자들의 고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날 저녁 태극전사들은 포르투갈을 제물로 삼아 ‘16강 신화’를 이뤘다.
집권여당의 지방선거 패배와 탈북자 딜레마, 그리고 월드컵. 빛바랜 2002년 신문이 지금의 정세를 빼닮은 듯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구상에서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한국이 4년 주기로 쳇바퀴의 다람쥐라도 된 걸까.
혹시 이번 선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유권자가 있다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날 것을 권하고 싶다. 2002년 여름의 축제가 끝난 뒤 우리 사회가 걸어 온 길을 되짚어 보면 내 한 표가 갖는 무게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운이 좋으면 그 시절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의 편린에 젖어드는 행운을 덤으로 챙길 수도 있다. 동아닷컴의 PDF 서비스를 이용하면 예전 지면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효과를 확인했다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때도 앞의 선거를 다룬 흘러간 신문과 만나 보자. 선택의 엄중함을 거듭거듭 가슴에 새기면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사정엔 어둡지만 31일엔 꼭 투표할 생각이다. 평가전일망정 한국팀 경기를 청계광장의 붉은 물결 속에서 응원했으니 귀국에 따른 통과의례는 모두 치르는 셈이다.
일본을 떠나올 때 일본인 지인들은 “한국은 워낙 다이내믹한 곳이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겠다”며 위로성 송별사를 건네곤 했다. 옛 신문을 들추어내고 새삼 안도한 것은 4년간의 변화를 따라잡기가 예상보다 쉬울 거라는 얄팍한 계산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그 사이 대한민국에선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건가.
박원재 국제부 차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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