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호주 시드니에서는 ‘사법권의 독립: 문화, 종교, 성,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주제로 8차 세계여성법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캐나다 대법원장 베벌리 매클래클린 씨는 “여성 법관이 많아지면 ‘행복’한 법원이 된다”는 말로 여성 법관의 증가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대법원에 입성한 뒤부터 대법관들의 생일에 케이크가 전달되는 등 법원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세계 43개국에서 모인 여성 법관 350여 명은 법원에 여성 법관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했다.
뉴질랜드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인 사이언 엘리어스 씨는 “법원은 재판을 통하여 법치주의의 근본원리인 ‘양성평등’과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민주적 정당성을 실현하여야 하지만 법원 자체의 구성에서도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성 법관과 다른 경험을 가진 여성 법관은 재판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까. 법관은 ‘기본적 인권’이라는 근본가치에 따라 사건을 파악하고 재판하여야 한다. 어느 사회에나 기본적 인권 존중에 역행하는 구습이 있고, 사법부는 그러한 구습이나 편견을 찾아 제거하여야 할 임무가 있다. 여성은 그동안 소수자 처지에 있었던 경험으로 사회의 주류인 남성이 잘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편견과 오해, 소수자들의 불이익을 더욱 잘 인식할 수 있다. 사법부로서는 여성 법관이 존재함으로써 현대적인 분쟁 즉 성차별, 가정폭력 같은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성 법관이 있음으로써 법원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매클래클린 씨는 “여성 법관이 있음으로써(피고인이나 변호인 등) 재판에 참여하는 여성은 자신이 법정에서 잘 이해받고 있고, 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잘 처리하는 편이고, 꼼꼼하다는 특성이 있다. 이는 단지 재판의 쟁점 자체에만 주목하기보다 법정의 전체 분위기, 법정 뒤에 있는 피해자 가족까지도 고려하는 데 유리하다. 법정 내 문화 중에도 바꾸어야 할 것이 더러 있는데 남성 법관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잘 의식하지 못한다. 여성 법관은 법정문화 개선에서도 큰 구실을 할 것이다.
이번 시드니 법관회의에 한국에서는 김영란 대법관을 비롯한 여성 법관 15명이 참석했다. 필자는 ‘사법의 전통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제로 한 발표 기회를 얻어 여성 후손의 종중원 지위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과 호주제 및 부성 강제주의 조항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등 여성 인권 도약의 기념비적인 판례를 소개했다. 한국 사법부의 이런 변화 노력 덕택에 필자는 세계여성법관회의 아시아 태평양지역 이사로 선출됐다. 그리고 한국은 2010년 제10차 세계여성법관회의의 국내 유치를 추진 중이다.
시드니 회의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도 최근 여성 법관 수가 현저히 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상급 법원과 주요 정책결정 부서에는 여성 법관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모든 나라의 공통된 현실이다. 매클래클린 씨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러한 곳들도 이제 좀 더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여성 법관을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여성 법관도 남성 법관과 마찬가지로 법치주의 원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여성 법관들은 능력과 재판 결과로 이를 증명할 것이다.
김영혜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세계여성법관회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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