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열린 ‘6·15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한 북측 안경호(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민간대표 단장이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한 후 묘지관리소장에게 했다는 말이 귀에 맴돈다.
도착하기 전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한반도가 전쟁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는 발언으로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른 그가 깍듯이 예의를 갖춰 전했다는 ‘용사’ 발언의 진의는 무엇일까?
축제의 막은 내려지고 그들은 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용사’에 대한 의문은 커져 갔다. 광주의 한 재야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1980년 이전부터 재야활동을 해 온 그로부터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5·18을 ‘반외세 무장투쟁’으로 규정해 온 그들에게는 5월 영령이 ‘반미성전의 용사’로 비쳤을지 모르나 이는 명백한 착각이며 터무니없는 망발”이라고 잘라 말했다.
수많은 ‘광주의 시민’은 1980년 5월 22일을 전후해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변 빌딩에 나붙은 ‘대자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대자보는 “우리의 혈맹 미국이 보낸 태평양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을 향해 항해 중”이라는 ‘출처불명’의 최신 뉴스를 전했다.
신문은 물론 전화마저 끊겨 버린,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사지(死地)에서 대자보를 접한 시민들은 “이제야 살았다”며 안도하고, 기쁨에 겨워 손뼉을 쳤다.
당시 뿌려졌던 ‘투사회보’도 전두환 공직 사퇴, 계엄령 즉각 해제, 구속 학생과 민주 인사 석방, 광주 시내 계엄군 철수를 주장했을 뿐 미국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시민들은 물론 소위 ‘항쟁지도부’까지도 ‘반미’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은 훗날 입수된 미 국무부 기밀문서와 신군부 핵심들의 증언으로 분명히 확인된다.
물론 미국은 10·26사태에서부터 ‘서울의 봄’을 거쳐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격렬한 ‘반미정서’의 뇌관을 건드린다.
“5월 22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비크 만의 항공모함 코럴시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미 행정부는 또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며 무력진압을 합법화했다.”(5·18기념재단 인터넷사이트 ‘5·18 역사알기’ 중)
“(광주 진압작전 과정에서) 김일성의 오판을 막기 위해 미국의 해·공군을 한반도 주변에 전개할 시간이 필요했고, 따라서 이 문제를 미국과 협의한 것이다.”(이희성 당시 육군참모총장 1988년 ‘광주청문회’ 증언)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후(事後) 진상규명과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 5·18 그때 그 현장의 반미성(反美性)과는 실오라기만큼의 연결고리도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번 광주행사는 6·15남북공동선언과 연계한 5·18 의미 되새기기를 표방했다. 그러나 북측 시각에 한 치의 변화가 없는 현실에서 과연 5·18에서 무엇을 이어받아 6·15공동선언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것인지 근본부터 다시 짚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광주라는 역사적인 도시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자못 감격했다는 안 단장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광주의 역사성은 무엇입니까?”<광주에서>
김권 사회부 차장 goqu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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