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새마을운동의 재인식

  • 입력 2006년 6월 21일 03시 00분


“각하. 이번에도 모두 똑같이 지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끄러워집니다.”

“정치적 부담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새마을운동은 실패할 거요. 성과를 올린 마을에만 지원하시오.”

1971년 봄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장관들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다. 여당 의원들도 ‘균등한 지원’을 건의했지만 거부당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박 대통령의 제창으로 시작됐다. 농어촌 환경개선과 소득증대가 일차적 목표였다.

정부는 그해 가을 약 3만4000개 마을을 선정했다. 마을당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지원하고 숙원사업을 하게 했다. 앞에 소개한 대화는 반년 뒤 중간 점검과 2차연도 지원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나왔다(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증언).

결국 박정희 정부는 성과를 거둔 1만6000개 마을에만 시멘트 500포대와 1t의 철근을 다음 해 공급했다. 반면 실적이 부진한 1만8000개 마을에는 지원을 중단했다. 그 대신 스스로 성과를 올리면 다시 돕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일은 하지 않고 노름이나 하는 게으른 농어촌과 부지런히 일해서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런 농어촌을 똑같이 지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강조했다.

혜택이 끊긴 마을은 술렁거렸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유급 마을’ 중 6000개가 3차연도에 다시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좌승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는 곧 출간될 ‘신(新)국부론’에서 “5년 만에 3만4000개 마을이 모두 합격선에 들어섰고 농촌의 가구당 평균소득은 도시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갔다”고 소개한다.

새마을운동에 대해 필자는 오랫동안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관(官) 주도 운동이 체질적으로 안 맞는데다, 일부 새마을 지도자가 ‘정권 거수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하던 모습, 전두환 정부 시절 대통령 친인척이 관련된 권력형 부패 등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시각이 달라졌다. 요즘 화법을 빌리면 새마을운동을 재인식하게 됐다. 정치적으로 이용된 부분이 없지 않았고 이런저런 한계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근면 자조(自助) 협동의 3대 원리를 바탕으로 한 새마을운동이 한국사회에 던진 충격은 긍정적 측면이 훨씬 컸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의사회 구현이니, 제2건국운동이니 하는 여러 관제(官製) 운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진 못했을 것이다. 중국을 비롯해 해외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겠다는 붐이 생길 수도 없다.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무차별적 시혜(施惠)가 아니라 적절한 인센티브를 통한 차별화로 자발적 성취 의욕을 자극한 점이었다. ‘한강의 기적’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박태준 최종현 같은 ‘성공의 주역’을 키워낸 것이 1등공신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필요하다. 하지만 분별없는 ‘퍼붓기식 지원’은 폐해가 더 크다. 최근 10여 년간 천문학적 규모의 농촌지원자금이 나갔지만 문제해결은커녕 도덕적 해이만 조장했다는 뼈아픈 현실은 무얼 말하는가. ‘관치 평둔화(平鈍化)’가 위험수위에 이른 지금 새마을운동의 소프트웨어는 의미 있는 정책적 시사점을 던져 준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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