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학교이자, 진보정치의 학교다. ‘이념’으로서 진보는 지방정치에서의 다양한 ‘정책’ 실험을 통해 그 관념적 과격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원래 진보 정치 원리란 소규모 집단에 잘 맞는 법이다. 아쉽게도, 중앙정치에서의 무능한 진보에 대한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성급한 대속(代贖)’은 진보가 유능해질 수 있는 ‘수련의 장’을 박탈해 버렸다.
‘유능한 진보와 청렴한 보수의 경쟁 구도’로 가는 길을 막는 또 다른 요인은 정계개편이란 꼼수다. 정당정치의 요체는 책임정치에 있으므로 권력을 누렸으면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당을 이리저리 쪼개 붙여 책임을 물 타기 하는 수법이 다시 용납돼서는 안 된다. 게임이 안 풀리니 경기 도중 갑자기 팀을 새로 짜겠다는 발상 아닌가.
지난 대선, 총선에서 노무현 후보와 열린우리당은 유권자들에게 약속했다. 한나라당의 6% 성장 공약에 맞서 7% 성장을 이룩하겠노라고. 효순이, 미선이의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미국에 할 말은 하겠노라고. 동북아 중심국가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당당히 서겠노라고. 다른 건 ‘깽판’치더라도 남북관계만은 확실히 챙기겠노라고. 다음 대선은 이들에 대하여 그 약속이 이행되었는지를 추궁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방 정치지도의 9할을 시퍼렇게 점령한 한나라당은 그날 시퍼렇게 멍든 호남의 민심에 다가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두환, 노태우 시절 집권세력은 물론 유신시절 인물까지 그대로 두고 무슨 낯으로 광주를 대한단 말인가. ‘외환위기’와 ‘차떼기’의 주홍글씨를 새긴 과거. 성추행과 공천 비리에 얼룩진 현재. 다음 대선은 그 단절의 약속에 대하여 진정성을 판가름하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전임, 후임 국회의장이 잇달아 개헌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권력을 독식하는 대통령제의 폐해를 막으려면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5년 단임 대통령의 정치적 무책임을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임이 안 풀리니 이제 경기 도중 아예 룰을 바꿔 보자는 발상 아닌가.
1987년 헌법의 대통령 직위가 전혀 ‘제왕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슈거트와 캐리의 정량분석에서 이미 밝혀졌다. 한국 대통령의 정부 구성 권한은 조사 대상 42개국 헌법 중 26위였으며 그 입법 관여 권한도 공동 7위에 그쳤다. 어쩌면 현 노무현 대통령의 ‘무권위적’(탈권위적이 아니라)인 모습이야말로 현재 헌법의 대통령제가 현실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의원내각제란 말 그대로 ‘의원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부 형태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의원이 ‘정당을 매개로’ 내각을 구성하는 정부 형태다. 1962년 헌법의 제정에 즈음하여 유진오가 그의 신앙과도 같았던 의원내각제 주장을 철회한 것은 ‘정당의 미발달’이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현존 정당 중에서 10년의 수명을 채운 예가 없다. 이처럼 취약한 정당구조하에서 어떻게 의원내각제가 가능하겠는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정부’와 국민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책임정치를 강화하고, 이로써 정부 선택에서의 식별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제 정부 형태의 중요한 장점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는 정당의 해체 분열 재편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설령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개정하더라도 정당, 정치인의 책임의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그 무책임성은 개선될 리 없는 것이다.
2001년에서 2005년까지 세금으로 정당에 지급된 국고보조금은 2200억 원을 상회한다. 6·25전쟁 때 본 총피해액의 1할에 달하는 액수를 쏟아 부은 셈이다. 혈세를 아무리 쏟아 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나. 걸핏하면 판을 다시 짜는 ‘리셋’ 정치인. 약속을 금방금방 잊어 주는 ‘메멘토’ 국민. 이 환상의 복식조 앞에서 정당정치, 책임정치의 구현은 영원한 꿈일 뿐이다.
신우철 중앙대 교수·헌법학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