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이기길 바랐다면 같은 아시아의 대표이자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다는 옛정 때문이었을 것이고 호주를 응원했다면 분명 거스 히딩크 감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이 호주에 1-3으로 역전패한 다음 날 일본 지인과 점심을 함께했다. 그를 위로했다. 아직 두 게임이나 남아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그는 “한국은 이겼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했다. 그날 밤 한국팀은 토고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인사치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가슴에 남았다. “일본-호주전의 중계방송에서 일본팀의 공이 골대를 빗나가면 ‘아쉽다’고 말하는 걸 듣고 감동했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에게도 그런 말은 큰 힘이 될 것 같다.” 어느 팀이건 공이 골대를 비켜 가면 아쉬운 일이다. 중계방송에서 달리 표현할 말이 있을까. 너무나 당연한 말에 감동을 느낀다니,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일본은 크로아티아와 득점 없이 비겨 1무 1패로 세계 최강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기적을 기대해야 할 힘든 처지가 됐다. 우리는 토고에 2-1 역전승, 프랑스에 극적인 1-1 무승부로 매번 최고의 밤을 맞았다.
그 즈음에 일본 신문의 한 특파원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복잡한 속내를 이렇게 분석했다. “필자가 보기엔 ‘겉으로는 힘내라, 속마음은 지라’는 것이 아닐까…격려와 동정은 한국이 출발부터 호조를 보여 16강 진출의 전망이 밝기 때문에 갖는 잠시의 ‘여유’일 것이다. 일본에 대한 동정과 격려는 민족적 쾌감이기도 하다.”
이 글에 대한 동의 여부는 개인의 몫이다. 일본의 일부 누리꾼도 한국인들이 호주를 응원한 데 대해 섭섭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자 우리는 “왜 자기들이 지고, 화풀이는 한국한테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만큼은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너그럽게 봐 줄 필요가 있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의 정신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때 두 나라는 독도와 야스쿠니신사, 역사교과서 문제를 껴안고 있으면서도 축구에서만큼은 서로를 격려할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당시 16강전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골든골로 이겼을 때 아사히TV는 “한국이 이탈리아를 깼습니다. 이로써 아시아가 바뀝니다. 일본에도 희망을 안겨 줬습니다”고 외쳤다. NHK는 “한국팀의 기백과 일체감에는 정말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시샘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은 “부럽다, 분하다, 그러나 기쁘다”는 말로 감정을 정리했다. 한국이 4강까지 승승장구하자 일부 국가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니, 심판 덕을 봤느니 하며 시비를 걸었지만 일본 매스컴은 이를 무시했다. 한국도 예선전에서 일본을 응원했고, 일본팀도 16강에 진출했다. 반쪽이 될지도 모를 월드컵이 2배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상대국에 대한 배려 덕분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독일 월드컵은 끝났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두 나라 사이에 얼굴을 붉혀야 할 일들이 얼마나 더 벌어질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도 차선의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이 이웃 나라와의 관계다. 그럴 땐 뭔가 문제 해결 모델이 필요하다. 한일 두 나라가 갖고 있는 최고의 문제 해결 모델이 바로 어렵사리 성사된, 그러나 성공한 2002년 공동 개최 월드컵이다.
마침 2010년 월드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다. 한국과 일본처럼 갈등과 반목을 넘어 화해로 가는 데 축구공이 꼭 필요한 나라다. 남아공 월드컵에선 한국과 일본팀이 4강전에서 만나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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