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성석제 ]급식사고, 그리고 추억의 도시락

  • 입력 2006년 6월 27일 03시 00분


급식으로 인한 식중독 파동 이후 학생들이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양푼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와중에도 밥을 합치고 나누어 먹는 과정에서 공동체적인 유대와 정서를 맛보고 추억을 공유하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자란 지방의 농촌 마을에서 매일 도시락을 싼다는 것은 어머니들에게 여간한 숙제가 아니었다. 시부모의 밥상에 찜으로 올려야 할 달걀이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기라도 해야 아이가 ‘읍내산 도시락’ 앞에서 자기 도시락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이 지난한 숙제 때문인지 먼 동네 사는 시골 아이들일수록 도시락을 가져오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눠 주는 옥수수빵(이름이 ‘급식’이었다)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나마 반 정도만 아껴 가며 떼어 먹고 집에 있는 동생에게 갖다 준다고 조심스럽게 책보에 싸서 먼먼 길을 뛰어가곤 했다.

혼식·분식 운동이 한창일 때는 불시에 선생님이 서로 반을 바꿔 들어와 보리와 쌀을 규정대로 섞었는지를 조사했다. 농사꾼 집안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읍내 여학생이 향기로운 꽃 보자기에 싸 온 눈부시게 흰 쌀밥 도시락이 기사도 정신과는 아무 관계없는, 소똥 냄새 가실 줄 모르는 내 짝의 도시락과 바뀌기도 했다. 그 여학생은 그것이 자기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100% 보리로 지은 시커먼 밥에 고추장과 등굣길 밭에서 따온 고추가 전부인 도시락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먹어야 했는데, 고양이와 모기를 합친 것 같은 울음소리로 그냥 넘어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어느 하루 도시락을 못 싸 간 적이 있었다. 여느 날처럼 1교시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보통 때 같으면 학기 초 머리 굵은 몇몇 아이가 작당하여 단체 구입한 ‘왕포크’를 꺼내 들고 도시락 수탈에 나섰으련만 그날은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도시락을 내줄 수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 남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는 장난도 성립하는 것이었다. 그때야 알게 되었지만 평시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아이들은 남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보충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 늦게까지 남는 아이들끼리 학교 앞 분식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는 자연스럽게 양푼 비빔밥의 일가친척인 ‘라면 국물에 도시락 말아 먹기’가 이루어졌다. 그때 ‘함께 말아 먹던’ 추억 덕분에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즉각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것만큼 동질감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식중독 파동을 계기로 도시락이 급식을 대체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시락이 많아진다면 급식의 중앙집중, 획일성, 대량화에서 생기는 집중적이고 되풀이되는 대형 사고는 분명 줄어들 것이다. 어머니들에게는 다시 힘든 숙제가 돌아오는 것이겠지만 도시락은 다양하고 분산적인 가치, 대화와 추억을 의미한다.

이번 사건에서 정말 맘이 졸아드는 것은 ‘내 도시락 이야기’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급식이 아니면 점심을 거를 수밖에 없는 결식 학생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현실, 그리고 도시락을 ‘공유’하는 데는 숙맥인 이들이 급식 중단 때문에 혹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진 않을까 하는 걱정 탓이다.

자라나는 세대가 먹는 음식에 관해서는 앞선 세대가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한다. 위생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준 음식을 먹고 탈이나 나게 만들고서는 어른이랍시고 고개를 들고 다닐 자격이 없다. 그래서인가, 어른은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고개 들고 책임지겠다는 모습을 찾기 힘든 것은.

성석제 소설가

※사외(社外) 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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