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정운찬 총장이 남긴 것

  • 입력 2006년 7월 11일 22시 58분


대학은 중세 서양에서 시작됐다. 12세기에 문을 연 파리대와 볼로냐대가 최초의 대학으로 꼽힌다. 중세 대학들은 자율권을 얻기 위해 투쟁했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이 있을 때 교수들은 즉각 강의를 중단했다. 교수와 학생 전체가 몽땅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도 했다.

강의를 중단하면 학생들이 귀향해 지역 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대학이 떠나면 국가의 이미지가 떨어졌다. 이 ‘무기’를 활용한 대학들의 끈질긴 투쟁은 대학의 자율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 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지난해 10월 서울대 개교 59주년 기념식에서 “대학의 자율성은 허울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재정, 조직, 인사 가릴 것 없이 대학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업인 출신으로 대학 총장이 된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18일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언론 인터뷰에서 “대학에 와 보니 대학에 대한 규제가 기업에 대한 규제보다 훨씬 심하다. 대학은 거의 체념 상태”라고 고백했다. 헌법이 보장한 대학의 자율성이 극심하게 훼손당하고 있다는 생생한 현장 증언이다.

정부는 대학의 목을 조이는 압제적 정책을 펴면서도 아주 일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정부는 그렇다 치고 대학들이 과연 자율성 수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사립학교법이 개정되고 사학 측이 강하게 반발했던 1월, 전국의 사립대 총장 100여 명이 참석한 전국대학총장회의가 서울대에서 열렸다. 총장들은 이날 집단적으로 사학법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진표 교육부총리가 이 자리에 나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회의 도중 김 부총리 앞에서 사학법에 반대 목소리를 낸 총장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총장들은 “교육부가 사학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데 어떻게 나서겠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지난해 8월 교육부가 ‘논술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학들은 “세계에서 논술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며 반발했으나 한 달 뒤 실제 가이드라인이 나오자 대학들은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겠다”고 합창했다. 2008년 입시에 대해서도 대학들은 결의대회를 하듯 “교육부 방침에 따라 내신 반영률을 높이겠다”며 항복선언을 했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19일 물러나는 정 총장은 외롭게 대학의 자율성을 외친 사람이었다. 지난해 7월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與圈)이 서울대의 통합교과형 논술을 본고사로 규정하고 ‘서울대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을 때 “서울대의 입시 방향이 옳다”며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교육 당국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3불(不)정책에 반대하고 수월성 교육을 강력히 주장했다.

세계적 대학의 육성은 현 시점에서 ‘시대정신’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국내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10개만 만들 수 있다면 입시 과열 문제는 크게 완화될 것이다. 김병준 씨가 노 대통령의 뜻대로 새 교육부총리에 취임한다면 대학에 적극적으로 메스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부터 교육부 주변에선 “대학의 2분의 1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노 정부가 대학을 수술하려는 의도에 의구심이 들거니와 뜻이 순수하다 해도 ‘선무당이 사람 잡는’ 식의 정책은 대학 경쟁력을 후퇴시킬 뿐이다.

대학 발전이 자율성 확보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확인됐다. 순한 양처럼 권력에 복종하는 대학의 태도는 ‘정권과 대학의 달콤한 동거’가 이뤄졌던 권위주의 시절과 별 차이가 없다. 자율권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대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정 총장의 행보는 그가 퇴임하는 시점에 더 빛이 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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