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노統의 포옹, 부시統의 조깅

  • 입력 2006년 7월 2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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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보여 준 최고의 장면은 자이툰부대 병사와의 포옹이다. 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야 했던 대통령의 고뇌와 국민을 향한 애정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 장면이기 때문이다. TV를 통해서도 “대통령님 한번 안아 보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며 달려든 병사의 충정(衷情)과, 눈시울이 붉어진 대통령의 마음속 기류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분이 오전 5시에 ‘호시우행(虎視牛行) 편지’를 쓰며 ‘대통령보다 국민이 높은 나라’를 실없이 거론한 게 아니었군. 모름지기 대통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분에 대한 경계를 조금 풀었다.

그로부터 1년 7개월. 대통령과 병사가 나눈 포옹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생각이 바뀌었다.

계기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만들었다. 부시는 얼마 전 백악관에서 의족을 한 이라크전 참전 용사와 조깅을 했다. 젊은 상이용사는 대통령과 함께 400m를 달린 뒤 “큰 영광”이라며 기뻐했다. 부시는 “그가 매우 자랑스럽다”고 치켜세웠다.

과연 부시의 조깅은 행복한 행사였던가. 전쟁터에서 두 다리를 잃은 23세 젊은이의 웃음은 진실한 것이었나. 불구가 된 아들뻘 젊은이와 함께 달리며 부시는 정말 기뻤을까.

남의 나라 일이라서 그런지 내 눈엔 금세 다른 게 보였다. 한창 나이에 다리 없이 남은 생을 살게 된 젊은이. 그를 보고 미소 지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웃고 있는 부시에게 2500명을 넘어선 이라크전 미군 전사자 가족들이 흘리는 피눈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이라크의 불행은 두 사람의 웃음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까.

남의 나라 거울을 통해 보니 노 대통령의 포옹 뒤에 숨어 있는 모습도 드러난다. 그들의 몸짓은 전형적인 정치적 상징조작이다. 권력자는 피지배자가 정치권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온갖 상징조작을 동원하여 권력을 미화한다. 정치학자 찰스 메리엄은 그 가운데 정부에 대한 존경, 복종, 희생, 합법성의 독점에 대한 인정 등을 이끌어 내기 위해 권력을 정당화 합리화하는 행위를 크레덴다(Credenda)라고 불렀다. 노 대통령의 포옹과 부시 대통령의 조깅은 권력자가 국민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교묘한 연출인 것이다.

돌아보면 노 대통령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징조작을 했던가. 말로, 행동으로. 정책으로….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인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처럼 잘 속는 순진한 백성과 별것 아닌 성과도 대단하게 평가하는 관대한 국민이 꽤 있을 테니까.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갖춰야 할 요소의 으뜸으로 주는 것을 꼽았다. 사랑은 주는 것이란다. 자이툰부대 병사를 껴안는 퍼포먼스를 했던 노 대통령은 국민에게 무엇을 주었나. 많은 것을 받았다면 유권자들이 5·31지방선거에서 대통령과 집권당을 그토록 철저하게 응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 한마디, 튀는 행동 하나로 국민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다.

프롬이 꼽은 나머지 사랑의 요소는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다. 일일이 따져 볼 필요도 없다. 노 대통령이 단 한 가지라도 충실히 챙겼더라면 국민이 지금처럼 등을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마침내, 미사일 위기 속에 불안해하는 국민에게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더니 “북한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상식 파괴적 발언까지 했다. 상징조작의 절정에 올랐다고 해야 하나.

대통령은 여전하다. 하지만 국민은 변했다. 부단한 학습효과 덕분에 속지 않게 됐다. 이대로라면 노 대통령이 만들겠다던 ‘대통령보다 국민이 높은 나라’는 새빨간 거짓말이 되고 만다. 변할 것인가 그대로 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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