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의 이런 분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유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양호민 서대숙 이정식을 빼고 무슨 얘기가 되느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 세 분은 북한 연구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들이다. 학문적 기여도 지대하다. 그럼에도 김창순과 김남식을 준거의 두 축(軸)으로 삼으려는 것은 분류의 일반성(완결성)보다 그 유용성 때문이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북한 연구의 지형이 아주 선명히 나타난다. 이른바 ‘진보’라는 세력이 어떻게 ‘북한’이라는 화두를 독점하게 됐으며, ‘보수’는 왜 담론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게 됐는지 등이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당연히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도 보인다.
김창순은 북한 연구의 ‘주류’다. 평북 의주 출신인 그는 만주 국립대 하얼빈학원에서 러시아사를 전공하고 1·4후퇴 때 남하해 평생을 북한 연구에 헌신해 왔다. 그가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과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기념비적 저작이다.
육군 정훈학교 강사를 지낸 경력이 말해 주듯 그는 반공(反共)과 지공(知共)의 관점에서 북한을 본다. 무슨 주제를 다루든 공산주의의 모순과 북의 대남 적화 전략을 염두에 둔다. 사실관계와 정보를 중요시하며, 이를 통해 북한 체제의 허구를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이런 기조는 그가 1972년 창간해 지금껏 펴내고 있는 월간 ‘북한’에서 잘 나타난다.
작년 81세로 작고한 김남식은 김창순과 다른 길을 걸었다. 충남 논산 출생인 그는 남북을 넘나든 독특한 인생 역정을 바탕으로 민족과 자주의 관점에서 북한을 보려고 했다. 한때 통일원 상임연구위원으로 일하기도 한 그가 세상을 떴을 때 제자와 지인들은 이렇게 그를 추모했다.
“선생은 대학 강단에 선 적은 없지만 1세대 북한 연구가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 스승이었다. 선생이 아니면 ‘남로당연구’와 ‘한국현대사 자료총서’ 15권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은 1990년 이전에는 외롭게 민족과 통일문제를 연구해 오다 6·15공동선언으로 평소 선생이 주장한 남북교류와 평화통일 방식이 현실화되면서 주목받게 됐다.”
“1월 2일 전화통화에서 (올해를) ‘자주통일 원년’이라며 서로 격려했는데…. 선생은 자주 통일의 신념과 낙관을 갖고 계셨기에 온갖 역겨움을 감내하셨다.”
김남식은 탈(脫)냉전 바람이 불던 1980년대 후반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그를 따르는 일단의 젊은 연구자들이 ‘북한연구회’란 공부 모임을 만든 것도 이 무렵이다. 평소 김남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종석 통일부 장관(당시 대학원생)도 한 멤버였다. 그들에게 ‘반공’은 이미 효용가치를 상실한 냉전의 유물에 불과했다. 이제는 자주와 민족에 기초한 ‘내재적 접근’만이 북한을 바로 보는 길처럼 보였다.
역시 1980년대를 휘저은 수정주의의 영향이 컸다. 민주화와 더불어 한국사회는 수정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주류 북한연구’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을 보지 않는 사람은 북한을 바로 보는 게 아닌 세상이 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내재적 접근’이 북한 문제에 새로운 통찰력과 해법을 준 것도 아니었다. 김대중 정권 이래 대북 포용정책의 실패에서 보듯이 북을 다루는 수단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겪고 있다.
김창순과 김남식 간의 단절을 누군가는 이어야 한다. 유길재 교수는 주류 북한 연구가들의 1970년대 연구 성과가 ‘관변 연구’라는 이유로 수용되지 못한 게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김남식 그룹에 의해 발전적으로 수용됐더라면 아주 튼튼한 북한 연구의 토대가 마련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동감이다. 그랬더라면 외눈박이 자주론(自主論)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학교 선생님들이 김일성, 김정일의 가계사(家系史)에 불과한 북한 역사교재를 통째로 베끼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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