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벌을 내리는가.”
10년 전 8월 2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새 복지개혁법안에 서명하자 민주당은 분노로 들끓었다. 빈곤 가정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평생 5년으로 제한하고, 그것도 일을 해야만 지원한다는 내용에 좌파는 경악했다.
우파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면 평등과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쪽이 좌파다. 우파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믿지만 좌파는 하늘이 먼저 도와줘야 스스로 도울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파는 이기적으로 보이고 좌파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 공화당이 주도한 개혁법안 역시 지나친 복지 혜택이 빈곤층을 되레 가난의 굴레에 묶어 둔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있는 사람이 더하다고, 없는 사람은 다 죽게 생겼다고 좌파는 악담을 했다.
지금 대부분의 미국 언론과 싱크탱크는 클린턴 복지개혁을 성공으로 평가한다. 진보적으로 분류되는 브루킹스연구소 역시 ‘잘됐다(It worked)’고 보고서를 냈다. 복지 수혜자가 10년간 60%나 감소했고 80%가 어떻게든 일자리를 잡았으며 복지 혜택을 졸업한 사람들의 수입도 25%쯤 늘어났다. 아이들이 거지가 되기는커녕 아동 빈곤율도, 10대 미혼모도 크게 줄었다. 좌파 논리가 틀렸음이 입증된 것이다.
개인은 사회보다 힘이 세다. ‘엄한 사랑’은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사회연대감보다 효력을 발휘한다. 정부와 제도는 물론 중요하다. 단, 올바른 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한다는 점에서다. 미국 정부는 어서 자립하라고 빈곤층의 등을 떠밀면서도, 일만 시작하면 자녀양육비와 근로소득보전세(EITC) 등 사회안전망으로 뒷받침했다. 경제도 10년간 꾸준히 성장한 덕분에 정부가 따로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일자리는 얼마든지 생겼다.
“일이 나를 구했다”고 기뻐하는, US투데이지에 소개된 50대 여성을 보면 정부 정책 하나가 수백만 명의 당당한 ‘자립 인간’을 길러냈다는 것이 실감난다. 좌파 논리에 안주했다면 평생 남 탓만 하면서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복지가 보호계층을 더 고통스럽게 하면서 권력만 살찌운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개혁에 자극받은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도 취업을 조건으로 한 복지를 도입해 실업률과 빈곤의 동반 감소에 나섰다.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 해소 대책의 일환으로 복지 예산 비중을 미국 수준으로 대폭 늘리는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을 다음 달 내놓는다고 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은 외면하고 예산만 늘리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두 달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오랜 검증을 통해 확인했다”며 과도한 노동시장 보호와 생산시장 규제가 일자리를 잡아먹는 정책이라고 했다. 1930년대 미국의 뉴딜정책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은 더 위험하다. 대공황은 쓸모없는 댐 건설로 극복된 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물러갔다. 미 재무부 관료 출신 브루스 바틀릿은 “실업자 고용도 많지 않고 다음번 경기침체의 씨를 심기 때문에 무가치를 넘어선 해악”이라고 했다.
평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좌파 이념은 고상해 보여도 경제적 효력을 잃은 지 오래다. 나라와 국민을 개조하겠다는 야심 찬 정부가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면 과대망상이거나 시대착오라고 봐야 한다. 경제 민주화든, 민주 경제든, 아니면 한국적 경제모델이든 정부가 어떻게든 결과의 평등을 이루겠다는 평등민주주의로는 세계화시대에 발 붙이기 어렵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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