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혁명을 통해 ‘앙시앵레짐(구체제)’과 권위주의의 상징인 국왕을 죽인 뒤에야 민주주의가 찾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만개한 유럽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겪었다. 근현대사에서 민주 혁명을 통해 지도자의 목을 매단 적이 없는 한국에서는 4·19혁명 못지않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이 민주의식 확산에 기여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 그의 당선에 민주주의 발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도 있었다. 군인도 아니고, 정치 거물도 아니었던 첫 대통령의 탄생,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노무현 효과(Roh's Effect)’라고도 불렀다.
집권 초 ‘노무현 효과’가 일면의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3년 반이 지난 지금, 시중에서 도는 ‘노무현 효과’에는 짙은 허탈감이 배어 있다.
①역발상의 지겨움
대선 후보 시절 노 대통령의 “반미주의자면 어떠냐”, “아내를 버려야겠습니까” 등 역발상 발언은 권위주의적인 3김과 이회창 씨에게 질린 많은 유권자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어지는 역발상 대응은 불안하다. 3년 반이 돼서도 “미국은 일절 오류가 없는 국가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따져야 한다고 장관들을 코치하는 모습은 지겹기까지 하다. 일본에 대해 ‘각박한 외교전쟁’을 선언했을 때 치솟았던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물러서려야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말에도 바닥에서 꼼짝 않는 것은 이런 스타일에 식상했기 때문이다.
②이류·삼류의 확대재생산
노무현 정권이 내건 ‘주류세력 교체’는 이류 삼류의 확대재생산으로 변질됐다. 하다못해 조그만 봉제공장에만 가 봐도 다 안다.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 지금 정권 핵심부에는 각각의 ‘업계’에서 이류 삼류로 평가받는 사람이 너무 많이 포진해 있다.
이 정권 출범 후 벌어진 각종 ‘코드’ ‘보은’ ‘낙하산’ 인사 논란은 일류가 부담스러운 이류가 삼류를 확대재생산해 가는 과정이다.
③‘어때주의’ 창궐
‘반미면 어때’는 ‘큰 정부면 어때’로, 다시 ‘코드 인사면 어때’로 점점 영역을 넓히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할 상황에 오히려 고개를 꼿꼿이 쳐드는 낯 두꺼움과 오기가 만연하고 있다. 대통령의 최측근이 청와대 코앞에 횟집을 차리고, 학문적 얼룩을 부끄러워해야 할 청문회 자리에 하얗게 화장을 하고 나타나는 용기(?)가 놀랍다.
④‘누가 돼도 좋다’
정권 초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누가 돼도 지금보다 낫다’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역으로 ‘어떤 사람이 되면 안 되는지 알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래서 역발상보다는 건전한 상식에 따르고, 코드는 좀 안 맞아도 일류를 기용하며, ‘뭐가 어때’보다는 뭐가 문제인지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국민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사람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차기 대선까지는 1년 4개월이 남았다. 시중에는 “노 대통령이 남은 임기에 뭔가 ‘큰일’을 벌일지 모른다. 그 일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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