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강한 궁정(宮庭)정치의 전통 때문에 힘과 정보의 ‘청와대 쏠림’ 현상은 극심하다. 하지만 대통령 앞에 올라가는 정보는 ‘증류수’처럼 참모들에 의해 철저히 여과(濾過)된 것이다. 그런 만큼 쏠림에 반비례해 바닥민심과 동떨어진 ‘정보의 외딴섬’이 되기 쉽고 이는 역대 대통령이 감염됐던 ‘궁궐병(病)’의 원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국가정보원장 등 정보책임자들의 독대(獨對)보고마저 없앴다. 모든 정보는 국정상황실에서 취합해 올린다. 민생현장 방문도 ‘정치적 쇼’라며 사실상 중단했다. 원로(元老) 의견 수렴에 대해서도 “들어보니 다 비슷한 얘기”라며 시큰둥해한다. 야당과 언론의 비판은 ‘악의적’이라고 되받기 바쁘다. 노 대통령의 궁궐병이 전임자들보다 심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노 대통령은 5·31지방선거 후 “선거에서 한두 번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참패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여당 안에서까지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나왔다. 노 대통령이 이달 13일 일부 언론사 간부에게 “내가 뭘 잘못했는지 한번 꼽아 보라”고 말했다니, 여당 사람들의 걱정이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3년간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을 밑돈 경제성적표, ‘이혼 문턱’에 온 한미동맹, 파경에 이른 한일관계, 핵실험까지 준비하는 북한과 함께 외쳐 온 공허한 ‘민족자주(自主)’의 합창, 공권력 부재와 국가정체성의 실종…. 새삼 열거하기도 지겹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성난 민심’의 실체조차 모르는 듯하다는 점이다. 현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서민조차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을 육두문자로 욕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맘때 지지율은 16%였는데 나는 19%이니 낫다”고 말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취재가 필요한 부분이다.
노 대통령은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백악관 전직 관리는 최근 본보 취재진에 “작년 11월 경주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북한을 궁지로 몰지 말라’고 거칠게 말한 이후 부시 대통령의 감정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미국과 다 얘기됐다”고 했지만 이 관리는 “노 대통령이 국내정치적으로 점수를 따고 북에 잘 보이려 한다”고 지적했다.
여러 차례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했던 노 대통령은 이번엔 “끝까지 국정장악력을 행사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참여정부는 마지막 날까지 인사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핵심 측근들의 호언과 일맥상통하는 말로 마치 ‘대통령의 권력만은 누리겠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대통령 직(職)은 ‘권력투쟁’의 성과물도, ‘즐기는 자리’도 아니다. 여론에 겸허히 귀를 열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다. 그러자면 먼저 대통령의 궁궐병부터 치료해야 한다.
이동관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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