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民과 官의 서비스 격차

  • 입력 2006년 8월 30일 20시 11분


3년 반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실수로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에는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같은 신분증과 신용카드들이 들어 있어 난감했다. 그러나 신분증과 카드를 다시 발급 받고 살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다양한 민원행정 부서와 은행 및 신용카드 회사의 서비스를 비교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원행정 서비스가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민(民)과 관(官)의 서비스는 질과 처리 속도에서 비교가 안 됐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분실 신고와 재발급을 위해 찾아간 동사무소와 경찰서에서 ‘왜 바쁜 사람을 괴롭히느냐’는 인상을 받았다면 지나친 말일까. 왜 세금 내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상냥하게 맞이하는 은행이나 카드회사 직원과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신용카드 재발급에 걸린 기간은 불과 3, 4일. 전화로 신고하고 새로 나온 카드를 사무실에서 배달 받았다. 하지만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분실 신고는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동사무소와 경찰서에 직접 찾아가야 했고 20일이나 걸렸다. 그것도 본인이나 가족이 직접 받아와야 한다. 한국에서 싱글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실감하게 해 줬다.

운전면허증 분실 신고는 주소지 관할이 아닌 다른 경찰서에서도 접수해 줘 그나마 나은 편. 주민등록증은 분실 신고와 재발급을 모두 주소지 동사무소에서만 처리하니 바쁜 직장인들은 어쩔 것인가. 우편으로 보내 줄 수 없느냐는 질문에는 배달 과정에서의 분실 가능성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테러 때문에 한국보다 훨씬 보안 조치가 엄격한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신분증인 운전면허증 재발급은 인터넷으로 신청하고 4, 5일 만에 우편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인터넷 시스템이 미국보다 발달한 한국에서 왜 인터넷 신고가 안 된다는 건가. 국가가 운영하는 우체국을 공무원이 믿지 못해 우편으로 보내줄 수 없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체신 행정의 신뢰도가 그 정도라면 귀중한 서류나 편지는 어떻게 믿고 맡기란 말인가.

전세권 설정 등기를 위해 찾아간 구청과 등기소에서도 수십만 원의 등록세와 교육세를 내면서 왜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비용 때문에 법무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직접 찾아가는 서민들이 얼마나 힘들지 실감했다.

귀국길에 이용한 대한항공과 은행 및 카드회사에서 경험한 민간기업의 서비스와 행정 관청의 서비스를 비교하는 것이 가당치 않을지도 모른다.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는 민간기업과 망할 걱정이 없는 행정기관이나 ‘철밥통’ 소리를 듣는 공무원의 서비스를 비교하는 건 무리일까.

그러나 기획예산처가 최근 공개한 민원 사례에는 세금 10원 독촉장을 등기우편으로 받은 경우가 포함돼 있다. 국정홍보처는 880개 중앙정부기관, 시군구 지자체와 공기업 등에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동정사진을 6장씩 월 2차례 우편물로 보내 예산 낭비라는 지적을 받았다. 국민을 위해서는 못 써도 자신들을 위해서는 예산을 멋대로 써도 괜찮다는 발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양식 행정자치부 제1차관(전 정부혁신본부장)은 ‘민간에 뒤지지 않는 정부 서비스가 혁신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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