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오명철]여고생 딸이 눈물 흘리는 이유

  • 입력 2006년 9월 6일 19시 53분


서울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에 사는 선배 한 분의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이다. 이곳 중학교에서 공부를 꽤 잘하던 딸아이가 강북의 외국어고등학교에 무난히 합격했다. 딸뿐 아니라 온 가족이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딸이 외고에 진학한 지 1년여 뒤. 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매사 의욕을 상실해갔다. 평소 딸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눠 왔다고 자부해 온 아빠는 고심 끝에 딸을 직장 근처의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불러내 저녁을 같이하며 “무슨 고민이 있어 그러느냐. 엄마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 아빠가 거들어 줄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 보라”고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딸이 어렵사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빠. 전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쁜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안 올라요. 중학교 때에는 조금만 해도 상위권에 들었는데 외고에 와서는 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성적이 중간을 못 넘어요. 정말 자존심이 상해 못살겠어요.” “그렇지 않다. 외고 학생들은 모두 중학교에서 너처럼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이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성적이 금세 떨어지는 거야. 물론 매일 놀다시피 하면서도 시험 볼 때마다 일등을 맡아 놓고 하는 아주 특별한 아이들도 있지만.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네 페이스대로만 하면 돼. 네가 가고 싶은 대학에 진학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까.”

아빠는 딸의 주된 고민이 ‘이성’이나 ‘부모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성적’에 관한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딸의 이어진 토로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아빠. 근데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남들이 부러워하는 강남에 살고, 중형 자가용 승용차도 있는데….” “그래도 고층 타워나 고급 빌라에 사는 아이들에 비하면 너무나 차이가 나요. 외제차를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많은데 우리 차는 너무 구식이어서 정말 창피해.”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세상에 우리보다 어려운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절대 사람을 돈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빠는 사춘기의 딸이 부잣집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 다니다 보니 주눅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위로했다. 하지만 이어진 세 번째 질문은 정말 그의 말문을 막았다.

“아빠. 그런데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들이 얼굴과 몸매도 예쁘고 남자친구도 많은 것은 정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요.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정말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해요.”

딸은 끝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고, 아빠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딸이 속상해할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한참 만에 생각을 정리한 아빠는 딸에게 말했다. “아빠는 네가 외고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운전사 딸린 고급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지 못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령 지금보다 형편이 더 좋아진다고 해도 아빠는 가급적 너를 검소하게 키우고 싶다. 다만, 용모(容貌)에 대해서는 원판(原版)인 엄마 아빠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방법을 좀 강구해 보자.”

딸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아빠는 이날 딸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적절한 범위’에서 성형수술을 해 주겠노라고 약속한 뒤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딸은 요즘 별다른 불만 없이 학교에 잘 다니고 있고, 이따금 밤늦게 귀가하는 아빠에게 안마를 해준다고 한다. 딸이 원하는 만큼의 부자가 아니어서 미안했던 아빠 또한 딸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씩은 덜어 가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잘생긴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게 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 현실이 이따금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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