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대우사태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은 그랬다. 5조8000억 원의 빚, 채권단의 돈줄 죄기, 협력업체와 거래처의 동요….
퇴출, 청산, 감원과 같은 살벌한 용어가 난무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국내 가전시장은 삼성과 LG라는 걸출한 경쟁자가 장악했던 터. 당장 간판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우일렉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단명(短命) 선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잔병치레 없이 7년을 살았다. 1만여 명의 직원 중 절반 이상을 내보내는 아픔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생산과 영업 현장을 묵묵히 지켰다. 채무 재조정 덕을 보긴 했지만 해마다 200억, 300억 원의 이익도 냈다.
이승창 사장은 “회사가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솔직히 나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수명이 다했거니’ 하고 체념할 즈음이면 어디서 힘이 났는지 용케 고비를 넘기더라는 것이다.
기업은 생명체다. 질기고 질긴 게 사람의 목숨이듯, 기업의 명줄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생태계에 적응하면서 자생적으로 형성한 유전자(DNA)도 갖고 있다.
그래서 기업의 DNA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반드시 탈이 난다. 생체 특성을 무시한 채 장기이식 수술을 강행하면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빅딜(기업 간 대규모 사업교환)의 실패는 그런 점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기업정책의 명의(名醫)와 돌팔이를 가르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하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40나노미터(nm) 32기가비트(Gb) 낸드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해 반도체 역사를 다시 썼다. 비교조차 안 되지만 대우일렉도 신제품을 만든다.
2001년 산소 발생 에어컨, 2003년 살균 기능 냉장고에 이어 12일엔 신형 김치냉장고를 내놓았다. 채권단의 엄격한 자금관리로 제대로 된 연구개발(R&D) 투자는 엄두를 못 낼 형편인데도 꾸준히 틈새상품을 선보인다. 배가 고프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게 생명체의 본능이다.
경제 여건이 악화되면서 쟁쟁한 기업들이 인수합병(M&A)의 제물로 나왔다. 경영진의 판단 착오 탓에 멀쩡했던 기업이 헐값 매물로 전락하기도 했다.
카드업계 1위를 질주한 LG카드, 리비아 사막을 누빈 동아건설의 새 주인이 정해졌다. 중동 신화를 창조한 현대건설은 입찰을 앞두고 있다. 대우일렉의 진로도 결정됐다.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인도 업체가 선정됐다.
한 시대를 풍미한 회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해당 기업 임직원들은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주인이 누가 되든, 이름이 어떻게 바뀌든 기업 고유의 DNA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기업은 국부 창출의 주역이기에 앞서 나와 이웃의 생계와 꿈을 책임지는 동반자다. 우리는 이런 기업의 고민과 운명을 너무 쉽게 재단한 것은 아닐까. 사람처럼 기업의 DNA도 다르다는 점을 당국자들이 인정한다면 얽히고설킨 기업정책의 실마리는 쉽게 풀릴 수 있다.
M&A 대상 기업이 단명하리라는 예상은 앞으로도 빗나갔으면 좋겠다. 기업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박원재 특집팀 차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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