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그랬다. 집권 초 경쟁국들이 미래를 향해 숨 가쁘게 뛸 때 이 정권은 과거사 문제에 달려들었다. 다른 나라들이 상향등 켜고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동안 우리 정부는 갓길에서 전조등 뒤로 옮겨 달고 과거사 들추는 작업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던 사람들이 임기 종반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또, 다음 정부가 할 일들을 미리 결정해 놓으려는 바람에 자꾸 나라에 걱정거리를 보태고 있다. 국민은 비판하기에도 지쳤는데 정권은 갈수록 힘이 솟는 모양이다.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분란이 커진 것은 서둘러 가져오는 것에 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데도 대통령이 “2009년도 좋다”며 당장 결판낼 것처럼 나섰기 때문이었다. 지금 미국과 합의해 놓으면 다음 정권은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다음 정권보다 더 이성적으로 정책을 판단할 것이란 보장이 없는 사람들이 말이다. 수도 이전 문제도 비슷한 사례다. 대부분의 관청은 다음 정권 때 이전토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때는 수도 이전에 반대했던 정당이 집권하고 있을 수도 있다. 새 정부는 참여정부가 정해 놓은 수도 이전에 돈을 퍼붓느라 다른 살림은 옹색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 정권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로 꼽히는 부동산정책 역시 ‘헌법만큼 고치기 힘든’ 악성조치들로 이뤄져 있다. 다음 정권이 자칫 개선하려다가는 부동산 값이 폭등하고 계층 간 갈등이 증폭되도록 이 정권은 곳곳에 지뢰를 깔아 놓은 것이다. 차기 정부는 아마 이 문제로 속깨나 썩을 것이다. 다음 정권은 임기 내내 헌법재판소 조직을 현 정권 코드의 인물에게 맡긴 채 속앓이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매년 1조 원 가까이 들어갈 대북(對北) 전기 공급을 포함해 이 정권이 북한과 합의한 대북 지원 정책들 역시 다음 정권의 출혈로 이어질 것이다.
이 정권은 한발 더 나아가 출범 후 최대 역작이라고 내놓은 ‘비전2030’에서 놀랍게도 향후 4대 정권이 할 일을 그려 놓았다. 국가에 장기 계획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유능하고 국민의 인정을 받는 정부에 의해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방향과 내용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과거 몇 차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같은 것이 그런 예다. 그러나 1100조 원을 들여 앞으로 수십 년간 좌파성 정책을 이어 가겠다는 계획은 그렇지 못하다. 국민은 참여정부 한번으로 좌파 경험을 끝내고 싶어 한다. 이 프로젝트는 실천 가능성을 놓고 볼 때도 청사진이라기보다 공상과학 만화에 더 가깝다. 계속 낙제점을 받던 학생이 어느 날 느닷없이 10년 후 하버드대에 입학하겠다는 장기 계획서를 내놓은 격이다. 참여정부는 이처럼 다음 정권이 해야 할 과제들을 만드는 데는 아주 열심이었다.
임기 중 치적을 벽화에 비유하자면 역대 몇몇 대통령 시절의 나라 그림은 희망과 풍요의 모습이다. 지금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어떤 이는 만일 대통령이 된다면 (공직시절의 성향을 감안할 때) 벽에 붓도 안 대고 나갈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건 그나마 다음 사람이 빈 벽에 그림 그릴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라 나은 편이다. 정말 골치 아픈 건 다음 정권 몫의 벽에 잔뜩 낙서나 하고 정권을 넘겨주는 경우다. 그것도 잘 지워지지 않는 ‘붉은 색’ 페인트로 사나운 그림만 잔뜩 그려 놓는다면 차기 정부가 겪어야 할 낭비와 고통은 보통이 아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말 소회를 밝히면서 “다음 정권도 한번 당해 보라는 나쁜 마음 반, 그래도 잘해서 넘겨줘야지 하는 좋은 마음 반’이라고 속을 털어놓았다. 5년 동안 잘 가꾸라고 맡긴 텃밭에서 그동안 소출도 시원찮았는데 설마 잡초 씨나 뿌리고 나가겠다는 말은 아닌지 듣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세월 가기만을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대다수 국민은 그래서 이 정권이 이제부터라도 다음 정부의 선택권을 존중해 임기 말까지 당장 해야 할 최소한의 일만 해 주는 것을 더 고마워할 것이다.
이규민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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