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오웅진 왕국’을 넘어 ‘하느님 왕국’으로

  • 입력 2006년 9월 20일 20시 44분


코멘트
1976년 청주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오웅진 신부는 첫 임지인 무극천주교회에 부임했다. 어느 날 묵주를 들고 기도하며 성당 마당을 돌던 그는 깡통을 들고 절뚝거리며 성당을 지나는 거지 노인을 보았다. 무심코 따라나선 그는 동냥을 마친 거지가 깡통을 들고 산모퉁이 가마니 천막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호기심에서 가마니를 열어젖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인이 자기보다 운신이 불편한 거지 18명에게 차례로 동냥해 온 음식을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 신부는 그 순간 성직자로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벼락 맞은 듯 깨쳤다고 한다. 일제의 징용과 고문으로 정신기능이 온전치 못했던 이 ‘거지 성자’는 무려 35년간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알코올의존증 환자 등을 돌봤다. 오 신부는 곧바로 시멘트 벽돌로 ‘사랑의 집’을 지어 이들 18명을 수용해 오늘의 꽃동네를 이뤄 냈다. 할아버지가 1986년 한국가톨릭대상을 수상했을 때 오 신부는 “나는 이 위대한 걸인 앞에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꽃동네가 이달초 조촐하게 설립 3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최근 몇 년 사이 생존권과 환경권을 둘러싼 인근 광산과의 마찰에서 비롯된 민형사소송에다 업무상 횡령 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회복됐지만 한때 후원자가 급감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동네는 오늘도 수도자 봉사자 등 800여 명이 충북 음성과 경기 가평 꽃동네 등 각종 시설에서 4000여 명의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 노인, 심신장애인, 부랑인, 정신장애인, 알코올의존증 환자 등 소외 계층을 돌보고 있다. 매달 1000원씩 내는 10만여 명의 후원 회원에다, 매년 20만 명의 연수생이 사랑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다. 꽃동네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이들도 실제로 가 보면 자원봉사자가 되거나 후원자가 돼 버린다. 동아일보에 만화 ‘식객’을 연재하고 있는 허영만 화백도 최근 이곳을 방문한 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 사람들을 두고 뭘 하고 있는지 자책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종교 담당 기자 시절 알게 된 인연으로 20년 가까이 꽃동네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보람도 있었고 실망도 적지 않았다. 꽃동네 회지에 오 신부 사진이 대거 실릴 때는 “꽃동네 회지가 오 신부 기관지냐”고 딴죽을 걸었고, 유력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질 때는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다. 천주교 내부에서도 오 신부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가 나왔고, 경남 거창에 제3의 꽃동네를 세우려 했을 때는 현지 신부가 앞장서서 반대해 뜻을 접어야 했다.

올봄 느닷없이 삶이 고단해져 꽃동네를 찾아가 오 신부와 대화를 나누며 많은 위안을 얻었다. “우리 가족 네 사람 먹여 살리기가 참 힘들다”고 하소연했더니 오 신부는 “나는 4000명, 그것도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 나는 꽃동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라면 지옥에라도 갈 것”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꽃동네 묘지로 데려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안구와 장기를 모두 기증하고 심장만 따로 떼어 이곳 한 귀퉁이에 묻을 것”이라고 말했다. 꽃동네를 위해서라면 어떤 시련과 오해도 감당하겠다는 결의로 읽혔다.

‘의로운 거지’가 뿌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30년 만에 국내 최대의 종합사회복지시설이 됐다. 꽃동네 30년은 민주화 투쟁에 버금가는 한국 천주교의 자랑이다. 오 신부는 이 과정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꽃동네를 ‘너무 크게’ 키운 것뿐이리라. 꽃동네는 이제 ‘오웅진 왕국’을 넘어 ‘하느님 왕국’으로 그 생명을 오래도록 이어갈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부국장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